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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

나훔은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제국의 폭력을 향해, 끝까지 정의를 붙잡으라고 외친 작은 예언자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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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힘” 앞에서 숨죽이던 사람들에게, 정의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선지자다. 그의 역할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공포와 피로 속에 앉아 있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데 있다. (참고: 나훔 1:1)

만약 네가 그 시대 유다 땅의 한 골목에 서 있었다면,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 소문과 세금 징수의 발소리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성경은 나훔의 출생을 길게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엘고스 사람”이라 불린다. 엘고스가 어디였는지조차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전승은 유다 어딘가의 작은 마을을 떠올리게 하고, 또 어떤 견해는 북쪽 지역을 생각하게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큰 도시의 왕궁 한복판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숨결이 가까운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그게 중요하다. 폭력의 시대에 가장 먼저 눌리는 건 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일상이니까. 그 속에서 자란 아이가 무엇을 보고,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 상상해 보게 된다. (참고: 나훔 1:1)

그가 어린 시절에 들었을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떠올려 보자. 유다 사람들은 이미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의 그림자를 알고 있었다. 어떤 날은 장터에서 “어느 성이 함락됐다더라”는 소문이 돌고, 어떤 날은 어른들이 목소리를 낮춰 “괜히 눈에 띄지 말자”고 말한다. 그 순간 아이 나훔의 가슴에는 작은 갈등이 생겼을 것이다. 두려움에 맞춰 조용히 살아야 할까, 아니면 마음 한구석에서 “이게 정말 옳은가”를 붙잡아야 할까? 그 갈등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너라면 그 두려움 속에서 어떤 쪽으로 기울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나훔은 한 가지를 더 배운다.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쉽게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이 입에 붙는 순간, 마음은 조금씩 무뎌진다. 여기서 첫 번째 중요한 선택이 나타난다. 그는 무뎌지는 편을 택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아프더라도 깨어 있는 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깨어 있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되니까. 그런데도 나훔은 눈을 감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 이 시대를 해석하려는 길로 들어선다. 그 선택이 왜 중요할까? 불의는 대개 “무감각”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너는 요즘 어떤 일 앞에서 스스로를 무디게 만들고 있지는 않니?

나훔이 전하는 말의 배경에는 니느웨가 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심장 같은 도시였다. 높은 성벽, 풍부한 물, 전쟁의 승리로 쌓아 올린 부와 자부심. 사람들은 그런 도시에 대해 “저긴 절대 무너지지 않아”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훔은 그 말에 맞서 선다. 영원해 보이는 힘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붙잡고, “그 힘이 폭력과 거짓으로 유지된다면 더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여기서 두 번째 갈등이 생긴다. 사람들은 “현실 감각”을 들어 그를 말릴 수도 있다. “지금 그 말을 했다간 네가 먼저 무너져.” 그때 나훔은 무엇을 선택했을까? 안전한 침묵인가, 위험을 감수한 진실인가? 너라면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 때, 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훔의 메시지는 누군가의 신을 북돋우기 위한 화려한 위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다시 보게 한다. 그의 말 속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공의가 함께 있다. 이 둘 중 하나만 붙잡으면 쉽게 흔들린다. 선하심만 말하면 현실의 폭력이 설명되지 않고, 공의만 말하면 마음이 냉정해진다. 나훔은 그 둘이 함께 있음을 보여 주려 한다. 그 균형은 믿기 어렵다. 특히 고통이 길어질수록 더 그렇다. 그래서 세 번째 갈등이 생긴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렇게 오래 두셨나?”라는 질문 앞에서, 나훔은 의심을 외면하지도, 절망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그는 질문을 품은 채로 하나님께로 간다. 너는 질문이 생길 때, 어디로 향하니?

나훔서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보자. 강한 바람이 불고, 먼지 사이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번진다. 나훔은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거친 표현을 전한다. 이 구절은 때때로 오해를 부른다. 그래서 여기서 네 번째 갈등이 필요하다. 이 말이 “사람의 분노”를 허락하는 말일까, 아니면 “폭력이 영원히 방치되지 않는다”는 선언일까? 나훔은 복수의 감정에 기름을 붓기보다, 억눌린 자들에게 세상이 도덕적으로 방치되지 않는다는 숨을 쥐여 준다. 그 차이는 크다. 너는 누군가가 벌받는 상상을 할 때, 마음이 시원해지니, 아니면 두려워지니?

여기서 다섯 번째 선택이 생긴다. 유다 사람들의 선택이다. 니느웨의 몰락 소식이 아직 오지 않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곧 무너질 거니까 참고 기다리자”는 말은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어렵다. 세금은 오늘도 걷히고, 모욕은 오늘도 이어지고, 아이들은 오늘도 겁을 먹는다. 그때 나훔은 말한다.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신다고. 그 고백을 믿는다는 건 “감정이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포가 모든 결정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작은 선택 하나, 이를테면 “거짓에 동조하지 않기” 같은 것에서 시작된다. 너라면 그 시대에, 강한 자에게 맞춰 나도 강해지려 했을까, 아니면 약한 자 곁에 남으려 했을까? (참고: 나훔 1:7)

나훔은 니느웨를 향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전차가 달리고, 강이 넘치고, 성문이 열리고, 도시가 흔들린다. 이 장면들은 단순한 재난 묘사처럼 보이지만, 여섯 번째 갈등을 포함한다. “왜 하나님은 폭력의 도시를 바로 무너뜨리지 않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무너지게 하실까?” 나훔은 그 시간을 ‘허락’이라기보다 ‘인내와 심판의 시간’으로 본다. 인내는 회개의 기회를 포함할 수 있고, 심판은 결국 책임을 묻는다는 뜻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나 떠올리게 된다. 요나가 니느웨에 갔던 때가 있었다. 니느웨가 한 번은 경고를 듣고 돌이켰다는 전승이 있다. 그렇다면 왜 나훔의 시대에는 무너짐이 선포될까? 여기서 일곱 번째 갈등이 생긴다. 회개를 미룬 공동체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너는 경고를 들었는데도 “나중에”라고 미뤄 본 적이 있니?

나훔은 니느웨를 “피의 성”이라 부른다. 폭력, 약탈, 거짓, 착취. 그는 그 죄가 단지 “나쁜 마음” 수준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찢는 구조가 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여덟 번째 선택이 등장한다. 듣는 사람들, 특히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은 쉽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 저들은 망해야 해.” 그런데 나훔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한 번 더 질문받는다. “정의가 이루어질 때, 너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정의는 피해자의 마음을 회복시키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가해자의 방식을 닮지 않도록 붙잡아 주어야 한다. 너는 억울함을 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이 너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바라본 적이 있니?

아홉 번째 갈등은 나훔 자신에게서 더 깊게 드러난다. 선지자는 ‘나쁜 사람들에게만’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선지자는 자기 공동체도 동시에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다. 니느웨가 무너지면 유다는 자유로워질까? 잠시 숨은 돌릴 수 있을지 몰라도, 곧 다른 제국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면 유다는 또 다른 선택 앞에 선다. 새로운 힘에 기대어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릴 것인가. 나훔의 말은 단지 “저 도시가 망한다”가 아니라, “너희는 무엇을 의지할 거냐”로 이어진다. 너는 위기가 끝난 뒤에도, 마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을까?

열 번째 선택은 ‘희망의 형태’에 관한 것이다. 나훔의 희망은 달콤한 환상이 아니다. 그는 전쟁의 장면을 숨기지 않는다. 도시가 함락될 때의 공포, 울부짖음, 끝내 멈추지 않는 폭력의 결과를 보여 준다. 그런데도 그는 말한다. 폭력의 고리가 끊길 수 있다고.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희망을 믿는다는 건, 현실을 무시하는 걸까?” 나훔은 오히려 현실을 더 똑바로 보면서, 그 현실이 최종 결론이 아니라고 믿는 것을 희망이라 말하는 듯하다. 너는 요즘 무엇이 “최종 결론”처럼 느껴지니?

나훔서에는 하나님을 “질투하신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사랑이 없는 질투가 아니라, 관계를 파괴하는 폭력과 우상을 향한 거부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은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여기서 열한 번째 갈등이 생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불편한 정의를 피하고 싶어 한다.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자기 의에 취하고 싶어 한다. 나훔은 그 두 길 모두를 조심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너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어떤 면을 더 쉽게 말하고 어떤 면을 피하니?

그리고 열두 번째 선택은 ‘기다림’이다. 많은 학자들은 나훔의 활동 시기를 니느웨 멸망(대략 기원전 612년) 전후로 추정한다. 또 나훔서 안에는 애굽의 노아몬(테베) 사건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어, 그 이후 시점일 가능성도 말해진다. 하지만 정확한 날짜는 성경이 친절하게 적어 주지 않는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붙잡을 건 “연대표의 완벽함”이 아니라, 메시지가 던지는 질문이다. “너는 언제까지 폭력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거니?” “너는 언제까지 정의를 ‘너무 이상적’이라며 밀어둘 거니?” 나훔은 기다림을 미화하지 않지만, 기다림 속에서도 선택은 계속된다고 말한다. 너는 기다리는 시간에 어떤 선택을 반복하고 있니?

나훔서의 마지막을 향해 가면, 니느웨의 몰락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평가’처럼 들린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치명적이다”라는 말은 잔인한 승리 선언이라기보다, 오래된 폭력의 결과가 결국 도시 자체를 무너뜨린다는 진단처럼 읽힐 수 있다. 그리고 “너의 악행을 당하지 않은 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은, 피해자의 숫자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열세 번째 갈등이 생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악의 몰락을 들을 때,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기 쉽다. “그래, 통쾌하다.” 그런데 나훔은 우리에게 한 번 더 묻게 한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누구의 상처를 보고 있니?” “너는 어느 편의 침묵에 서 있니?” 이 질문을 피하면, 나훔의 메시지는 단지 과거 이야기로 끝난다. (참고: 나훔 3:19)

나훔 개인의 마지막 기록은 조용하다. 그는 다윗처럼 왕으로 죽음을 기록하지도 않고, 모세처럼 장례의 장면이 길게 남지도 않는다. 성경은 나훔을 “책의 목소리”로 남겨 둔다. 어떤 면에서 그게 더 현실적이다. 정의를 말한 사람들의 삶은 종종 기록이 짧고, 흔적이 작다. 하지만 그 작은 흔적이 누군가의 마음을 오래 지탱한다. 나훔이 사라진 뒤에도, 그의 말은 남아 유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질문을 계속 던졌을 것이다. “너는 두려움에 의해 살 거니, 하나님에 의해 살 거니?”

니느웨는 결국 역사 속에서 무너졌다. 그 사실은 “나훔의 예언이 맞았다”라는 문장 하나로 끝내기엔 너무 크다. 왜냐하면 그 무너짐은 동시에 수많은 사람의 생존과 눈물, 그리고 전쟁의 상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훔을 읽을 때 우리는 승리의 환호보다 정의의 무게를 먼저 느끼는 편이 정직할지 모른다. 정의는 누군가를 조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모두가 폭력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너는 정의를 말할 때, 누구를 떠올리니? 그리고 그 정의가 너에게 불리해질 때도 붙잡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나훔이 남긴 여운을 한 관점으로 정리해 보자. 그는 우리에게 “세상이 망가진 채로 영원히 고정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준다. 동시에 그는 “정의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라는 경고도 준다. 그러니 나훔을 읽는 건 누군가의 몰락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오늘 내 자리에서 작은 폭력과 작은 거짓을 어떻게 다룰지 묻는 일이다. 너는 오늘, 어떤 작은 선택으로 이 이야기 안에 들어가고 싶니?

  • 나훔 1:1
  • 나훔 1:7
  • 나훔 1:15
  • 나훔 2:1
  • 나훔 2:6
  • 나훔 2:13
  • 나훔 3:1
  • 나훔 3:7
  • 나훔 3:8-10
  • 나훔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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