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다대오”로도, “유다(가룟이 아닌 유다)”로도 불린 인물은 기록이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한 장면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깊이 비춰 준다. 그는 눈에 띄는 업적보다 조용히 곁에 남는 선택으로 이야기에 힘을 보탠다.
사람들이 네 이름만 듣고 오해하기 시작한다면, 너는 그 자리에서 한 발 물러설까, 아니면 더 가까이 다가갈까?
성경은 다대오의 탄생 연대나 고향을 길게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집, 어느 골목에서 자랐다” 같은 확정적인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다만 예수님 시대의 갈릴리와 유다 땅의 공기, 장터의 소문, 로마의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장면은 상상 가능한 범위에서 조심스럽게 그려 볼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이름처럼 평범한 가정의 한 아들이었을지 모른다. 하루의 생계와 가족의 기대가 어깨에 얹혀 있는 사람, 눈앞의 현실이 먼저 보이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다. 병든 사람이 일어났다는 말, 억눌린 이들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말,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이 다시 사람 대접을 받았다는 말. 소문은 늘 과장되기도 하지만, 어떤 소문은 마음을 찌른다. 다대오의 첫 번째 갈등은 여기서 시작된다. “저건 정말일까, 아니면 잠깐 반짝이는 이야기일까.” 너라면 소문을 들었을 때, 안전한 삶을 붙잡을까, 아니면 확인하러 발걸음을 옮길까? (참고: 마태복음 4:23-25)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본 순간, 다대오는 선택해야 했다. 군중 속에서 구경만 할지, 아니면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까지 들어갈지. 들어가는 순간부터 삶의 결이 달라진다. 가족과 이웃의 시선이 따라오고, 일의 리듬이 깨진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이익과 마음 깊은 부름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따라가 보자”를 선택한다. 이때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기대가 섞였을 가능성이 크다. 너는 두려움이 있는 선택을 ‘나쁜 선택’이라고 바로 단정해 버리지는 않니? (참고: 누가복음 9:23)
열두 사도로 불릴 때가 온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셨다고 기록된다. 그 부름의 자리에서 다대오도 이름을 듣는다. 그 순간이 얼마나 떨렸을까. “내가 정말 이 자리에 어울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부름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큰 선택이다. 너라면 ‘자격 없음’이라는 마음이 올라올 때, 그 마음을 이유로 포기해 버릴까? (참고: 누가복음 6:12-16)
여기서 다대오는 독특한 갈등을 겪는다. 그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다. 그리고 같은 공동체 안에 “가룟 유다”가 있다. 훗날 그 이름은 무거운 그림자가 된다. 성경은 요한복음에서 아예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구분해 준다. 이 구분이 필요할 정도면, 사람들은 이름만 듣고 마음을 닫았을 수 있다. 그는 분명 이런 순간을 만났을 것이다. 누군가 “유다”라는 이름을 듣고 얼굴이 굳는 순간, 혹은 뒷말이 도는 순간. 그때 다대오는 선택해야 한다. “설명하며 인정받으려 애쓸까, 아니면 조용히 행실로 말할까.” 너라면 오해를 풀기 위해 즉시 큰 목소리를 낼까, 아니면 시간을 견딜까? (참고: 요한복음 14:22)
사도로서 파송도 경험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며 병든 자를 고치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다. 파송은 멋진 여행이 아니라 낯선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이다. 환영받을 때도 있지만 문전박대도 있다. 어떤 집에서는 “당신들 누구요”라는 차가운 시선이 돌아온다. 다대오는 그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그때 그는 선택한다.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방식대로 평화를 전하고 떠난다. 너라면 거절당했을 때, 그 경험이 너의 가치까지 결정한다고 착각하지는 않니? (참고: 마가복음 6:7-11)
예수님 곁에서 다대오는 많은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빵을 먹고 흥분하는 순간,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불편해하는 순간, 제자들끼리 누가 큰가 다투는 순간.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은 또 선택한다. “나는 이 공동체에서 무엇을 붙잡을까.” 인정과 서열을 붙잡을 수도 있고, 예수님의 방향을 붙잡을 수도 있다. 다대오가 조용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후자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너라면 사람들의 경쟁 속에서 마음이 거칠어질 때, 무엇으로 다시 부드러워질까? (참고: 누가복음 22:24-27)
그리고 드디어 가장 선명하게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장면이 온다. 마지막 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떠날 것을 말씀하신다. 마음이 무너지는 자리다. “곧,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때 다대오가 묻는다. 그는 혼자 궁금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대신해 묻는 듯하다.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질문에는 갈등이 들어 있다. ‘세상’이 바뀌길 바랐던 꿈, 당장 눈앞에서 바뀌지 않는 현실, 그리고 예수님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 답답함. 그가 질문하기로 선택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싶어서일 수 있다. 너는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 질문을 닫아 버리니, 아니면 조심스럽게 묻니? (참고: 요한복음 14:22)
“가룟이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요한복음 14:22-23, 개역개정)
예수님의 대답은 즉각적인 정치적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다. 사랑, 말씀을 지키는 삶,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거하신다는 약속으로 돌아온다. 다대오는 그 대답을 들으며 또 선택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믿을 것인가.” 꿈이 꺾이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는 도망치지 않는다. 너는 내 방식이 통하지 않을 때, 관계를 끊어 버리니, 아니면 더 깊은 뜻을 기다리니? (참고: 요한복음 14:23)
곧바로 이어지는 시간은 더 어둡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제자들은 흩어진다. 그 밤은 누구에게나 ‘살아남기’가 최우선이 되는 밤이다. 다대오도 두려웠을 것이다. 체포될지 모른다는 공포, 자신이 믿던 분이 끌려가는 충격, 그리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소리. 여기서 선택은 아주 현실적이다. “숨을 것인가, 남을 것인가.” 성경은 모든 제자의 발걸음을 세세히 기록하지 않지만, 부활 이후 그가 다시 모임에 있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너라면 실패와 공포가 몰려올 때, 다시 모일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참고: 마가복음 14:50, 사도행전 1:13)
십자가 이후의 침묵도 크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소식은 ‘끝’처럼 들린다. 그때 다대오의 마음에는 죄책감도 있었을 수 있다. “그때 더 가까이 있지 못했다.” 그 죄책감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다시 일으키기도 한다. 그는 어떤 쪽을 선택했을까. 성경의 흐름을 보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기도한다. 다대오도 그 안에 있다. 흔들리는 마음을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견딘다. 너는 무너진 뒤에 혼자가 더 편하다고 느끼지 않니? (참고: 사도행전 1:12-14)
오순절이 온다. 불같은 혀, 여러 언어, 사람들의 놀람. 그때 다대오는 또 선택해야 한다. “이 경험을 숨길까, 아니면 밖으로 나갈까.” 밖으로 나가는 순간, 조롱이 따라온다. “취했다.” “미쳤다.” 하지만 그는 그 흐름 속에서 증인이 되는 길을 택한다. 누군가 크게 설교하든, 누군가 조용히 곁에서 돕든, 모두가 증인의 일부가 된다. 너라면 사람들의 비웃음이 두려워 진짜 소식을 가슴에만 묻어 둘까? (참고: 사도행전 2:1-13)
사도행전은 이후 다대오의 이름을 길게 따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디로 갔다”를 확정할 수 없다. 다만 전해지는 전통들에서는 그가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전승은 그가 다른 사도와 함께 다녔다고도 한다. 하지만 등불노트의 관점에서는 여기서도 정직해야 한다.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상상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언어가 다른 도시로 들어갈지, 박해가 시작된 마을을 떠날지, 병든 사람의 집에 머물지, 위험을 감수하고 광장에 설지. 다대오도 그런 갈림길들을 수없이 지났을 것이다. 너라면 안전한 길과 의미 있는 길이 갈라질 때, 어떤 기준으로 발을 옮길까? (참고: 마태복음 28:19-20)
그가 만났을 사람들도 떠올려 보자. 이름 때문에 오해받는 다대오에게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는 일이 중요했을지 모른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잠깐의 공기가 바뀌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상처받지 않는 척’할 수도 있고, ‘설명하며 싸우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도들이 걸어간 길을 생각하면, 그는 점점 자기 이름보다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법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너는 네가 오해받을 때, 네 이야기를 지키느라 지쳐 버리지는 않니? (참고: 사도행전 4:12)
관계의 변화도 있다. 함께 지낸 사도들 사이에는 분명 각자의 성격과 속도가 있었다. 베드로는 앞으로 나서고, 요한은 깊이 관찰하고, 도마는 확인하고 싶어 한다. 다대오는 그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와 목소리를 찾아야 했다. 여기서도 선택이다. “나도 크게 말해야 존재감이 생길까, 아니면 필요한 때에만 말할까.” 그가 남긴 단 한 번의 질문을 보면, 그는 필요한 때에 말하는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말이 적다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는 말이 적은 사람을 쉽게 ‘관심이 없다’고 오해하지는 않니? (참고: 요한복음 14:22)
또 하나의 갈등은 ‘결과’에 대한 것이다. 어떤 사도는 많은 열매를 눈으로 보았을 수도 있고, 어떤 사도는 씨앗만 심고 떠났을 수도 있다. 다대오의 삶도 그랬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적을 때, 사람은 흔들린다. “내가 한 일이 의미가 있나.” 그때 그는 결과가 아니라 충실을 선택해야 한다. 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선한 일을 할 때, 그것을 계속할 수 있을까? (참고: 고린도전서 3:6-7)
마지막 기록과 죽음에 대해서도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어떤 방식으로”를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초기 교회 전승 가운데는 사도들이 박해 속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다대오도 그런 길을 걸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 선택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무겁다. “살기 위해 침묵할까, 아니면 사랑하는 분을 부인하지 않을까.” 너라면 생존이 걸린 순간에, 너의 신념과 관계를 어떻게 지킬까? (참고: 마태복음 10:28-32)
다대오가 남긴 여운은 ‘크게 남는 이름’이 아니라 ‘조용히 남는 방향’이다. 그는 세상을 단번에 뒤집어 달라는 마음을 품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다른 길을 배운다. 사랑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거하신다는 약속. 한 관점으로는, 다대오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네 기대와 다를 때도, 그분 곁에 남을 수 있니.” (참고: 요한복음 14:23)
그리고 또 한 관점으로는, 다대오는 이름 때문에 오해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등불이 된다. 사람들의 선입견이 네 정체성을 결정하게 두지 말라고, 행동과 선택으로 길을 내 보라고. 기록이 적어도, 그가 던진 한 문장의 질문은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을 일으킨다. 너도 오늘, 이해되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물어볼 수 있을까? “주님, 왜 이렇게 하시나요.” (참고: 요한복음 14:22)
- 마태복음 10:2-4
- 마가복음 3:16-19
- 누가복음 6:12-16
- 사도행전 1:12-14
- 요한복음 14:21-24
- 마가복음 6:7-11
- 마태복음 28:19-20
- 마태복음 10:28-32
- 사도행전 2:1-13
- 고린도전서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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