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노트
성경 스토리 해설 · 가이드 아카이브

마르다

베다니의 마르다는 예수님을 집으로 맞아들이며 사랑과 불안을 함께 살아낸 사람이다. 그녀의 선택들은 "잘하고 싶어서 더 지쳐버리는 마음"이 어떻게 믿음으로 자라가는지 보여준다.

언어: ko-KRslug: 마르다관련 회차: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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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는 예수님을 집에 모셔 들인 사람이고, 사랑을 "일"로 표현하려다 마음이 다쳐보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불평이 되었다가, 다시 믿음이 되는지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참고: 누가 10:38-42, 요한 11장)

만약 네가 마르다의 부엌 한복판에 서 있었다면, 냄비는 끓고 손님은 늘어나고 마음은 조급해지는데, 그 와중에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려는 걸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었을까?


성경은 마르다의 출생이나 어린 시절을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 따라가야 한다. 다만 조심스럽게 상상해보면, 마르다는 어릴 때부터 책임을 빨리 배우는 환경에서 자랐을지도 모른다. 집안일을 누가 맡아야 하는지, 손님이 오면 누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지, 집이 어수선하면 누가 정리해야 하는지.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이런 문장이 생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아." 그 문장이 나중에 그녀를 지켜주기도 하고, 무겁게 짓누르기도 한다. 이게 첫 번째 갈등이다. 책임감이 사랑의 언어가 될 때도 있지만, 동시에 외로움이 될 때도 있다. 너라면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어디까지 몰아붙였을까? (참고: 누가 10:38-42)

마르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한 집의 문턱에서 시작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지나던 때, 마르다는 그들을 집으로 맞아들인다. 그 선택은 단순한 친절 이상이다. 당시 한 여인이 낯선 남성 무리를 집으로 들인다는 건 시선과 소문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르다는 문을 연다. "당신들은 여기서 쉬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집의 평온과 자신의 평판 사이에서 한쪽을 택한다. 이것이 두 번째 선택이다. 관계를 얻을 수도,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자리에서 마르다는 환대를 택한다. 마음은 설렜을까, 떨렸을까? 너라면 안전한 거리두기 대신 환대를 선택할 수 있을까? (참고: 누가 10:38-39)

집 안은 금방 분주해진다. 물을 데우고, 빵을 준비하고, 자리도 마련해야 한다. 마르다는 손이 빠르다. 아마 평소에도 "잘 대접하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마르다의 시선이 멈춘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듣고 있다. 마르다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진다. "왜 나는 여기서 혼자 뛰고 있지?" 이것이 세 번째 갈등이다. 사랑으로 하는 일이 어느 순간 억울함으로 변하는 그 경계가 있다. 마르다는 불평하고 싶지 않지만, 불평이 목까지 차오른다. 너도 그런 적 있지 않나?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하는데, 혼자만 애쓰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말이다. (참고: 누가 10:39-40)

마르다는 결국 예수님께 말한다. 속에 있는 말을 꺼낸다는 건 용기이기도 하고, 관계를 흔들 수도 있는 위험이기도 하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이게 네 번째 선택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말한다. 그리고 그 말 속에는 숨은 감정이 있다. "나는 인정받고 싶어요." "나도 돌봄을 받고 싶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마르다와 마리아의 관계도 잠깐 흔들리고, 마르다의 마음도 더 뜨거워진다. 너라면 속상함을 숨길까, 말할까? (참고: 누가 10:40)

예수님은 마르다를 혼내듯 꺾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을 두 번 부르며 마음을 만진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이 대목은 마르다에게 다섯 번째 갈림길이 된다. "나는 틀렸어"라고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나는 사랑하려고 했어"라는 마음을 붙잡고 방향을 조정할 것인가. 예수님의 말은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라기보다, 사랑의 중심을 잃지 말라는 초대처럼 들린다. 마르다의 얼굴이 붉어졌을까, 눈물이 고였을까. 너라면 누군가가 너의 열심을 "염려"라고 말할 때, 어떻게 받아들일까? (참고: 누가 10:41-4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가 10:41-42, 개역개정)

그날 이후 마르다는 달라졌을까. 성경은 "마르다가 즉시 변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변화가 대개 천천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는 걸 안다. 마르다는 아마 다음번 손님이 올 때도 분주했을 것이다. 다만 마음 한켠에 이런 질문이 생겼을지 모른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내 방식의 완벽함을 섬기고 있는가?" 이것이 여섯 번째 선택이다. 일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다시 잡는 선택. 너도 바쁘게 사랑하다가, 정작 사랑을 놓친 적이 있나? (참고: 누가 10:42)

시간이 지나, 더 큰 폭풍이 마르다의 집을 덮친다. 이번에는 부엌의 분주함이 아니라 병상의 정적이다. 라사로가 병들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한다. 이건 일곱 번째 선택이다. 가까운 사람의 위기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라고 닫아버릴 수도 있지만, 그들은 도움을 구한다. 그 선택에는 믿음이 섞여 있다. "주님이 오시면 달라질 거야." 동시에 불안도 섞여 있다. "정말 오실까?" 너라면 절박한 순간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까? (참고: 요한 11:1-3)

그런데 예수님은 즉시 오지 않는다. 시간이 길어진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라사로는 결국 죽는다. 여기서 마르다의 여덟 번째 갈등이 터진다. "왜 늦으셨어요"라는 질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일 때가 많다. 마르다는 아마 집안일을 하면서도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혹시 예수님인가 하고. 그러다 문득 시신의 향을 막기 위해 무덤을 준비해야 하는 현실이 덮친다. 너라면 기다림이 길어질 때, 믿음은 더 자라나나, 더 마르나? (참고: 요한 11:17-19)

예수님이 마을 가까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르다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고" 마르다는 일어나 나간다. 이것이 아홉 번째 선택이다. 슬픔 속에서 움츠러들기보다, 그 슬픔을 안고도 만나러 나가는 선택. 마르다의 걸음은 빠르지만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녀는 말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은 원망처럼 들릴 수도 있고, 사랑의 고백처럼 들릴 수도 있다. 관계는 여기서 흔들리기도 하고, 더 깊어지기도 한다. 너라면 상처를 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을까? (참고: 요한 11:20-21)

마르다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라는 단어가 이어진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것이 열 번째 선택이다. 상처를 말한 뒤에도 소망을 놓지 않는 선택. 그 순간 마르다의 마음에는 두 감정이 함께 있다. 하나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애통함,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일하실 수 있다는 믿음. 이 "함께 있는 감정"이 마르다를 더 진짜 사람으로 만든다. 너는 슬픔과 믿음을 동시에 안아본 적 있나? (참고: 요한 11:22)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말한다. 마르다는 익숙한 교리를 꺼내듯 대답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아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를 교리의 자리에서 관계의 자리로 부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이때 마르다는 열한 번째 선택을 한다. 이해가 완벽하지 않아도 믿음을 말로 붙잡는 선택이다. 그녀는 고백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여기서 마르다와 예수님의 관계가 한 단계 깊어진다. 질문 하나가 남는다. 너는 절망의 한복판에서 어떤 고백을 붙잡을 수 있을까? (참고: 요한 11:23-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 11:25-26, 개역개정)

마르다는 마리아를 부른다. 이 장면은 열두 번째 선택이 된다. 슬픔을 혼자 떠안지 않고, 가족을 함께 부르는 선택.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라고 말할 때, 마르다는 단지 소식을 전달한 게 아니라, 관계를 이어준다. 마리아가 나와 울고, 사람들도 따라나오고, 눈물의 행렬이 생긴다. 감정은 더 커지고, 마르다의 마음도 더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마르다는 그 흐름 속에서도 예수님 곁에 서 있다. 너라면 가족의 슬픔 앞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참고: 요한 11:28-31)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돌을 옮기라고 하실 때, 마르다가 말한다.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실을 아는 사람의 말이다. 이것이 열세 번째 갈등이다. 믿음과 현실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돌을 옮기면 기적이 시작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가족의 상처가 더 드러날 수도 있다. 마르다는 망설임 속에서 솔직함을 선택한다. 숨기지 않고 말하는 선택.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부드럽게 이끌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하신다. 너라면 냄새 나는 현실 앞에서, 믿음을 어떻게 붙잡겠나? (참고: 요한 11:39-40)

돌이 옮겨지고, 예수님이 크게 부르신다. 그리고 라사로가 나온다. 이 장면에서 마르다는 열네 번째 선택을 한다. 놀람을 뛰어넘어 받아들이는 선택이다. 기적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무섭기도 하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으로 몰리고, 소문이 커진다. 마르다는 기쁨과 두려움을 함께 안는다. "이제 우리 가족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라는 두려움 말이다. 너라면 큰 은혜를 받았을 때, 그 은혜가 바꿔놓을 삶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참고: 요한 11:43-44)

기적 다음에는 언제나 반응이 따라온다. 어떤 이는 믿고, 어떤 이는 반대 편에 선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 이후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더 굳어졌다고 말한다. 마르다의 집은 사랑의 자리이면서 위험의 자리도 된다. 이것이 열다섯 번째 갈등이다. 예수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건 위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긴장이다. 마르다는 아마 집 문을 열 때마다 주변을 살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맞이한다. 너라면 신앙이 안전을 흔들 때, 그래도 가까이 서 있을 수 있을까? (참고: 요한 11:45-53)

며칠 뒤, 예수님이 다시 베다니에 오셨을 때, 마르다는 또 "섬긴다". 요한복음은 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르다가 시중들고, 라사로는 함께 앉아 있고, 마리아는 향유를 붓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마르다는 열여섯 번째 선택을 한다. 예전처럼 분주하기만 한 섬김이 아니라, 사랑의 자리를 지키는 섬김이다. 그녀는 이제 "듣는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않는다. 마리아의 표현이 낯설고 과감해도, 그것을 공격하지 않는다. 관계가 성숙해진다. 너는 다른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너와 다를 때, 불편해하나, 존중하나? (참고: 요한 12:1-2)

그 식탁에는 또 다른 긴장이 있다. 가룟 유다는 향유를 두고 불평한다. 그는 "가난한 자"를 말하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 마르다는 그 말을 들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 속으로는 "이 자리에선 사랑이 먼저 아닌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열일곱 번째 갈등이다. 신앙의 언어를 빌려 다른 마음을 숨기는 사람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마르다는 그 자리에서 크게 말하지 않지만, 그녀의 침묵도 선택이다. 괜한 싸움을 키우지 않되, 마음의 중심을 지키는 선택. 너는 공동체 안의 불편한 순간을 어떻게 다루나? (참고: 요한 12:4-6)

성경은 마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현장에 직접 등장했다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는 정직해야 한다. "성경은 여기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마르다는 분명 그 사건들을 들었을 것이고, 마음이 찢어졌을 것이다. 라사로를 살리신 분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 마르다는 그때 무엇을 했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보면, 그녀는 여전히 식탁을 준비했을지 모른다. 울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물을 데우고, 함께 앉아 이야기할 자리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이것이 열여덟 번째 선택이다. 큰 사건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계속하는 선택. 너라면 세상이 무너지는 소식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믿음을 지킬까? (참고: 요한 11:27, 요한 12:1-2)

마르다의 "마지막 기록"은 베다니 식탁 근처에서 멈춘다. 죽음에 대한 기록도, 이후 행적도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남는 여운은 분명하다. 마르다는 처음엔 "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셨고, 그 마음 때문에 속상함도 겪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말로 붙잡았고, 현실의 냄새 앞에서도 믿음과 솔직함을 함께 들고 섰다. 그 믿음은 완벽한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흔들리는 사람의 믿음이다. 너는 흔들리면서도 고백을 놓지 않아본 적 있나? (참고: 요한 11:20-27)

한 관점으로는, 마르다는 우리에게 "섬김"이란 단어를 다시 배우게 한다. 섬김은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마음이다. 속상하면 말하고, 기다림이 길면 울고, 그래도 다시 만나러 나가고, 결국에는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게 마르다의 길이었다. 오늘 너의 삶에서, 부엌과 거실 사이 어디쯤에 서 있나? 그리고 예수님이 네 이름을 두 번 부르신다면, 너는 어떤 마음으로 돌아설까? (참고: 누가 10:41-42)

  • 누가 10:38-42
  • 요한 11:1-6
  • 요한 11:17-27
  • 요한 11:38-44
  • 요한 11:45-53
  • 요한 12:1-8
  • 요한 12:9-11
  • 요한 20장 (부활 소식의 배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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