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돌로매는 열두 제자 명단에 늘 조용히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짧은 이름 하나가 우리에게 묻는 게 있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함께하는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모양이냐고. (참고: 마 10:2-4, 막 3:16-19, 눅 6:13-16)
사람들이 큰 박수 치는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에 너는 어떤 선택을 하니? 남들이 떠나갈 때, 너는 남는 편이니, 아니면 이유를 만들어 빠져나가는 편이니?
바돌로매의 출생에 대해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을 마음대로 그려버리면 안 된다. 다만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같은 인물로 보는 전통이 오래 이어져 왔다.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 단서를 따라가면 한 청년의 내면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참고: 요 1:45-51, 요 21:2)
만약 그가 나다나엘이라면, 그의 고향은 갈릴리 가나로 전해진다. 작은 마을에서 자란 청년이었을지 모른다. 아침에는 밭일과 장사 소리, 저녁에는 율법 이야기가 오가는 곳. 그런 곳에서 한 사람은 말보다 마음이 단단해지는 법을 배운다. 너는 어떤 환경에서 네 마음이 단단해졌니? (참고: 요 21:2)
첫 번째 큰 갈림길은 뜻밖에도 친구의 한마디로 시작된다. 빌립이 숨 가쁘게 달려와 말한다. “우리가 찾던 그분을 만났어.” 기쁨으로 번쩍이는 눈빛. 그 순간 바돌로매는 선택해야 한다. 믿고 따라가 볼 것인가, 아니면 “또 누가 나타났대” 하며 웃어넘길 것인가. 처음 들려오는 소문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이후의 길을 바꾼다. 너라면 그 소문을 들었을 때 한 발 다가갈까, 한 발 물러날까? (참고: 요 1:45)
그는 입을 열어 솔직한 말을 한다.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날 수 있겠느냐.” 거친 비난이라기보다, 현실 감각이 섞인 경계심일 수 있다.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태도는 때로 자기 자신을 지키지만, 동시에 기회를 놓치게도 한다. 여기서 두 번째 선택이 나온다. 의심을 품되, 확인하러 갈 용기가 있을까. 그는 빌립의 “와서 보라”는 초대 앞에서 결국 움직인다. 너는 의심이 생기면 관계를 끊니, 아니면 확인하니? (참고: 요 1:46)
그리고 그 만남에서, 예수의 말 한마디가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세우며 대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의 안쪽을 바로 겨누는 말이다. 그 순간 바돌로매의 감정도 바뀐다. 방어에서 놀람으로, 놀람에서 경외로. 예수 앞에서 그는 겉모습보다 속사람이 드러나는 경험을 한다. 너는 누가 네 마음을 정확히 읽어낼 때 기쁘니, 불편하니? (참고: 요 1:47-49)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47-49, 개역개정)
여기서 세 번째 선택이 선명해진다. 그는 체면을 지키며 말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는 걸 인정하고, 고백으로 나아간다. 그 고백은 단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관계의 방향을 바꾸는 선언이다. 예수를 “가르치는 분” 정도로 두지 않고, 자기 인생의 중심으로 모시는 결단이다. 너는 감동을 느낄 때, 그 감동을 고백까지 가져가니, 아니면 마음속에만 숨겨 두니? (참고: 요 1:49)
이후 바돌로매는 “열둘”의 이름이 적히는 자리로 들어간다. 성경은 그 과정의 자세한 대화를 적지 않지만, 상상 가능한 범위에서 생각해보면 이렇다. 집을 비우는 결정을 해야 한다. 가족의 눈빛, 생업의 끈, 익숙한 길이 한꺼번에 잡아당긴다. 네 번째 선택이다. 안정과 부르심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까. 그는 결국 따라간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단번에 끝나지 않고, 매일 반복된다. 너는 한 번 결심한 뒤, 다음 날도 같은 결심을 할 수 있니? (참고: 막 3:14, 눅 6:13-16)
그가 제자가 된 뒤 겪었을 장면들은, 다른 제자들의 이야기 속에 섞여 흐른다. 병든 사람이 몰려오고, 배고픈 무리가 기다리고, 바람과 파도가 흔드는 밤이 있다. 바돌로매도 그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선택은 “보는 방식”이다. 사람을 볼 때 그는 문제로만 봤을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얼굴로 봤을까. 같은 장면을 보고도 제자의 마음은 갈린다. 너는 지친 사람을 보면 부담이 먼저 오니, 연민이 먼저 오니? (참고: 마 14:13-21, 막 6:34)
여섯 번째 선택은 “말의 태도”다. 열두 제자는 함께 다니며 배우지만, 함께 다닌다고 늘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경쟁도 있고 오해도 있다. 누가 더 큰 자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공동체에서, 바돌로매는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성경이 그의 말다툼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건, 그가 갈등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기록될 만큼 큰 소리를 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 조용함은 도망일까, 절제일까. 너는 갈등 앞에서 목소리를 키우니, 마음을 다듬니? (참고: 막 9:33-35, 눅 22:24-27)
예수의 가르침이 점점 날카로워질수록, 사람들은 떠나간다. “이 말씀은 어렵다”는 말이 퍼질 때, 바돌로매도 흔들렸을 수 있다. 일곱 번째 선택은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다. 그때 베드로는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바돌로매도 그 자리에 서서, 떠나는 사람들의 등을 보며 자기 마음에 묻는다. 이 길이 편해서가 아니라, 진짜라서 남을 수 있나. 너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남니, 아니면 편한 길로 옮기니? (참고: 요 6:66-69)
그리고 가장 어두운 밤이 온다. 예수가 붙잡히던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흩어진다. 성경은 바돌로매가 그 밤에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단정하면 안 된다. 다만 여덟 번째 선택이 있었을 것이다. 두려움에 휩쓸릴 것인가, 마음을 다시 붙잡을 것인가. 아마 그는 숨었을 수도, 멀리서 지켜봤을 수도, 어느 순간 뒤늦게 따라갔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밤 이후다. 너는 실패한 뒤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니? (참고: 막 14:50, 요 20:19)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문을 잠그고 모인다.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을 피하는 시간. “우리가 그분을 따라다녔는데, 이제는 뭐지?” 같은 질문이 목구멍에 걸린다. 아홉 번째 선택은 “절망을 공동체로 견딜 것인가”다. 혼자 무너지는 건 쉽다. 함께 버티는 건 어렵다. 바돌로매는 그 자리에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열둘의 이름으로 다시 불리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상처가 나면 사람들 곁에 남니, 아니면 혼자 숨니? (참고: 요 20:19, 행 1:13-14)
부활 소식은 제자들의 숨을 다시 돌려놓는다. 하지만 부활조차 제자들에게 자동으로 용기를 주는 마법은 아니다. 밖으로 나가는 건 여전히 두렵다. 열 번째 선택은 “증인이 될 것인가, 조용히 살 것인가”다.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더 이상 자기 안전만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바돌로매도 그 흐름 안에 있다. 그의 이름이 예루살렘의 다락방 공동체 안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말해준다. 너는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그걸 나누는 사람이니, 간직만 하는 사람이니? (참고: 행 1:13-14, 행 2:1-4)
그 뒤부터는 성경이 그의 발걸음을 자세히 따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나라로 갔다, 저 나라로 갔다”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다만 초대교회 전승 속에서 바돌로매는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전승은 전승일 뿐, 성경 본문과 같은 무게로 다루면 안 된다. 그럼에도 그 전승이 우리 마음을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열한 번째 선택이다. 이름 없는 길을 걸어갈 것인가. 기록이 적다는 것은, 주목을 받기 위해 일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품는다. 너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니? (참고: 행 4:13, 행 5:41-42)
바돌로매를 떠올릴 때, 나는 “큰 장면”보다 “작은 반복”을 더 생각하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서는 결심,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떨림, 오해를 받고도 미워하지 않으려는 싸움. 그런 것들이 쌓여 한 사람의 제자를 만든다. 믿음은 한 번의 번쩍이는 순간만으로 서지 않는다. 너는 오늘, 어떤 작은 반복으로 너 자신을 만들고 있니? (참고: 눅 9:23)
마지막 기록, 즉 그의 죽음이나 퇴장에 대해 성경은 침묵한다. 우리는 그 침묵을 존중해야 한다. 다만 그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증인”으로 살았다는 큰 줄기는 분명하다. 이름이 짧게 남아도, 그 이름이 속한 공동체의 흔적은 길게 이어졌다. 기록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는 걸, 바돌로매는 조용히 보여준다. 너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니? (참고: 행 1:8, 마 28:19-20)
한 관점으로는, 바돌로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런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앞에 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곁을 지키는 사람도 필요하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의 신실함이 공동체를 버티게 한다. 너는 오늘 누구의 곁을 지켜줄 수 있을까? (참고: 고전 12:22-26)
- 마태복음 10:2-4
- 마가복음 3:16-19
- 누가복음 6:13-16
- 사도행전 1:13-14
- 요한복음 1:45-51
- 요한복음 21:2
- 요한복음 6:66-69
- 요한복음 20:19
- 사도행전 2:1-4
- 마태복음 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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