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는 여리고에서 세금을 걷는 일을 총괄하던 세리장이었고, 사람들의 미움 한가운데에 서 있던 부자였다. 그의 이야기는 “나 같은 사람도 불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예수가 어떻게 대답하시는지를 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참고: 누가복음 19:1-10)
만약 네가 여리고 거리 한복판에서,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예수가 또렷하게 부르는 걸 들었다면, 너는 그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리고는 길목의 도시였다. 길이 만나는 곳에는 늘 돈이 흐르고, 돈이 흐르는 곳에는 늘 감시와 세금이 따라붙는다. 상인들은 향료와 과일을 팔고, 여행자들은 숨을 돌리고, 로마의 권력은 숫자로 사람들의 삶을 눌렀다. 그 숫자를 실제로 손에 쥐고 계산해 내는 사람들이 세리였고, 삭개오는 그 세리들 위에 선 사람이었다. (참고: 누가복음 19:2)
성경은 삭개오의 어린 시절을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상상해보면, 그는 일찍부터 “작은 몸”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어디서나 시야가 가려지고, 말이 끊기고, 어른들 틈에 눌리며 자랐다면 어떤 마음이 생길까.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누구도 무시 못 할 자리”를 꿈꾸게 되지 않을까? 너라면 그 결핍을 무엇으로 메우려 했을까?
세리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로마의 시스템과 손을 잡는 사람으로 보이기 쉬웠고, 동족에게서 돈을 거두는 얼굴이 되기 쉬웠다. 삭개오가 그 길을 택한 첫 번째 선택은, 어쩌면 생계를 넘어 “안전”과 “지배력”을 얻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선택은 곧바로 두 번째 갈등을 낳는다. 돈은 늘 수 있지만, 사람의 눈빛은 식는다. 부자가 되면 더 존중받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멀어질 때가 있다. 너라면 그때 돌아설 수 있었을까?
세금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야기다. 누군가의 오늘 장사 결과, 누군가의 아이 학비, 누군가의 병든 가족을 위한 비용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라는 건, 단순히 세금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과정의 규칙과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세 번째 선택이 생긴다. 더 공정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기대되는 만큼 더 뜯어낼 것인가. 정직하게 하려 하면 조직과 상관의 압박이 있을 수 있고, 더 뜯어내면 양심이 갈릴 수 있다. 너라면 어떤 쪽 압박이 더 무서웠을까?
사람들이 삭개오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지 “직업” 때문만은 아니었을 수 있다. 누가복음은 그가 “부자”였다고 말한다. (참고: 누가복음 19:2) 부는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다. 그 흐름이 누군가에게는 억울함으로 느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삭개오의 네 번째 갈등은 바로 여기다. 그는 스스로를 “유능한 관리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를 “빼앗는 얼굴”로 기억했을지 모른다. 같은 사실을 두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생길 때, 너라면 어느 쪽의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관계가 끊긴다. 기쁨은 나누기 어렵고, 슬픔은 털어놓기 더 어렵다. 회당에서 자리를 얻기 어렵고, 잔치에 초대받기 어렵고,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마음껏 웃기 어렵다. 다섯 번째 선택이 다가온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살겠다”라며 버티는 길, 혹은 “이건 뭔가 잘못됐다”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길. 삭개오는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성경은 그가 오랫동안 변화하려 애썼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어느 날, 결정적인 만남이 그를 흔든다. (참고: 누가복음 19:1-4)
예수가 여리고에 들어오신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을 것이다. 병든 자가 낫고, 죄인들이 가까이 오고,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도덕의 선을 예수가 다시 그어 주는 이야기들. 삭개오에게도 그 소문은 들렸을 것이다. 여기서 여섯 번째 선택이 시작된다. “나는 그런 무리와 상관없다”라고 선을 그을 것인가, 아니면 “나도 한번은 보고 싶다”라고 마음을 내어볼 것인가. 너라면 남들의 시선이 두려운 상황에서, 그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을까?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참고: 누가복음 19:3) 여기에는 단지 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앞에 세워주지 않는다. 누가 “비켜”라고 말해도, 아무도 비켜주지 않는다. 그 순간 삭개오는 일곱 번째 선택을 한다. 포기하고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체면을 내려놓고 방법을 찾을 것인가. 그는 달렸다. 그리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참고: 누가복음 19:4)
나무 위는 이상한 자리다. 숨어 있는 것 같지만 가장 잘 보이고, 낮아지고 싶은데 가장 눈에 띈다. 삭개오의 마음도 그랬을지 모른다. “나를 보지 말아줘”라고 말하고 싶지만, 동시에 “누군가 나를 좀 알아봐줘”라고 울고 싶었던 마음. 너도 그런 때가 있었나? 사람들 앞에서는 강한 척하는데, 혼자 있을 때는 자꾸 숨이 턱 막히는 순간 말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냥 지나가지 않으신다. 그 많은 군중이 있는데, 예수는 나무 아래에서 멈추신다. 그리고 “삭개오야”라고 부르신다. (참고: 누가복음 19:5) 여기서 여덟 번째 선택이 삭개오에게 떨어진다. 이름을 불린 사람은 내려와야 한다. 내려온다는 것은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다. 변명도, 방어도, 체면도 함께 내려와야 한다. 너라면 그 이름 부름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예수는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참고: 누가복음 19:5) 이 말은 초대가 아니라 선언처럼 들린다. 삭개오는 “주님, 우리 집은 좁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급히 내려와 기뻐하며 영접한다. (참고: 누가복음 19:6) 아홉 번째 선택이다. 마음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예의를 핑계로 거리를 둘 것인가. 그는 열었다. 너라면 너의 집, 너의 사적인 공간에 누군가를 들이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군중은 바로 수군거린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참고: 누가복음 19:7) 그 말은 예수에게도 칼이 되고, 삭개오에게도 칼이 된다. 삭개오가 이제부터 겪어야 할 열 번째 갈등은, “예수를 맞이한 결과로 더 큰 비난을 받는 상황”이다. 사람들 앞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건 익숙했을지 몰라도, 예수까지 함께 욕먹는 장면은 다를 수 있다. 너라면 그 순간 예수를 뒤로 물려서라도 자신을 보호하고 싶지 않았을까?
성경은 그 집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길게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상상할 뿐이다. 그러나 결과는 기록되어 있다. 삭개오가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참고: 누가복음 19:8) 이것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결단의 문장이다. 열한 번째 선택이다. 마음만 뉘우치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돈과 구조까지 바꿀 것인가. 너라면 진짜 변화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절반을 주겠다”는 말은 멋있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삶이 흔들리는 결정이다. 재산의 절반은 단지 숫자가 아니다. 그동안 자기를 지탱하던 안전장치의 절반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네 갑절”은 더 구체적이다. 과거의 행동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행동이 남긴 상처를 실제로 회복하겠다는 뜻이다. 율법에는 도둑질의 경우 네 배 배상이 언급되기도 한다. (참고: 출애굽기 22:1) 삭개오의 선택은 자기 변명으로 시간을 끄는 길이 아니라, 회복의 비용을 치르는 길이었다. 너라면 네가 잘못한 사람을 떠올릴 때, “미안해”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열두 번째 갈등이 생긴다. 삭개오가 이렇게 선언하면, 그의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가난한 이들은 놀랄 것이다. “정말이야?”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세리 조직은 흔들릴 수 있다. 동료들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해?”라며 불안해할 수 있다. 권력자들은 “이 사람은 이제 믿을 수 없겠군”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삭개오는 그 모든 반응을 예상했을까. 변화는 언제나 관계를 다시 짜게 만든다. 너라면 너의 변화가 너의 친구들과 직장과 가족의 질서를 바꿀 때, 그 책임을 지고 싶을까?
예수는 그 자리에서 선언하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참고: 누가복음 19:9) 그리고 이어서 이유를 덧붙이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참고: 누가복음 19:10) 이 말은 삭개오에게는 이름표를 다시 붙여주는 말처럼 들렸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배신자, 죄인, 탐욕” 같은 이름표를 붙였지만,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 잃어버린 자, 찾음 받은 자”라는 방향의 이름표를 붙이신다. 너는 지금 어떤 이름표를 달고 살아가고 있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쉬워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구원은 도장처럼 찍히지만, 삶은 습관과 관계의 시간 속에서 다시 걸어야 한다. 삭개오가 다음 날 출근했을 때, 그는 예전처럼 돈을 계산할 수 있었을까? “이번에는 눈감아 주지”라는 유혹이 왔을 때, 그는 어떻게 했을까? 열세 번째 선택이 매일 반복되었을 것이다. 큰 결단 다음에는 작은 충성이 온다. 너라면 큰 결단 후에 찾아오는 작은 유혹을 어떻게 다루겠니?
또 하나의 현실도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용서는 “받는 쪽의 시간”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바로 마음을 풀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오래 걸린다. 어떤 사람은 끝내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삭개오가 배상금을 들고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이 바로 열렸을까? 혹은 얼굴도 보기 싫다며 문이 닫혔을까? 열네 번째 갈등이다. 진심을 보여도 오해가 남을 수 있다. 그때 너라면 다시 화가 나서 “그래도 나는 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까?
삭개오는 키가 작았지만, 그날의 선택들은 작지 않았다. 그는 군중의 시선 앞에서 나무 위로 올라가는 부끄러움을 견뎠고, 예수의 부름 앞에서 내려오는 용기를 냈고, 비난 앞에서 예수를 숨기지 않았고, 회개를 말로만 하지 않고 돈과 제도로 옮겼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예수가 삭개오를 “군중 뒤에서” 불러내셨다는 점이다. 구원은 때때로 가장 공개적인 자리에서, 가장 개인적인 이름으로 시작된다. (참고: 누가복음 19:5)
삭개오의 이야기는 단지 “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걸음을 시작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한다. (참고: 누가복음 18:13) 삭개오는 그 비유의 사람처럼, 현실 속에서 자비를 만나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장면을 보여준다. 너는 지금 멀리 서 있니, 아니면 내려와서 문을 열 준비가 되었니?
성경은 삭개오의 죽음이나 말년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후의 삶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누가복음이 이 장면을 남긴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셨고, 그 찾으심은 “좋은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움받던 사람”에게도 닿는다. (참고: 누가복음 19:10)
마지막으로, 삭개오의 여운은 질문으로 남는다. 예수는 왜 그 집에 들어가셨을까? 한 관점으로는, 삭개오 한 사람의 구원뿐 아니라, 여리고 공동체가 “회복이 가능한가”를 보게 하시려는 의도도 읽을 수 있다. 누군가가 바뀌면, 돈의 흐름이 바뀌고, 상처의 기억이 다시 만져지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바뀐다. 너는 누군가의 변화가 불편할 때가 있니, 아니면 기쁠 때가 있니?
삭개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구원”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방향임을 느끼게 된다. 이름을 불리면 내려오고, 문을 열면 함께 앉고, 마음이 바뀌면 손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 모든 시작은 한 문장일 수 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참고: 누가복음 19:5)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9-10, 개역개정)
혹시 너도 사람들 틈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니? 그때 너는 더 숨어버리니, 아니면 나무 위로라도 올라가 보니? 삭개오는 “보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바뀌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변화는 누군가의 비난보다, 예수의 부름이 더 크다고 믿는 자리에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지금 무엇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니?
- 누가복음 19:1-10
- 누가복음 19:5-7
- 누가복음 19:8-10
- 누가복음 18:9-14
- 누가복음 3:12-13
- 누가복음 5:27-32
- 출애굽기 22:1
- 레위기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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