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이후의 긴 침묵 속에서, 셈은 가족의 수치를 덮고 약속의 계보를 이어 가는 선택을 했던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크게 앞에 나서기보다, 한 번의 결단으로 이야기의 물길을 바꿔 놓는 인물이다.
만약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떨까. 아버지의 실수를 보게 된 그 밤, 너는 눈을 크게 뜨고 떠들었을까, 아니면 조용히 덮어 주었을까.
셈의 이름이 처음 우리 앞에 또렷이 놓이는 건, 세상이 물로 정리된 뒤다. 성경은 그가 노아의 아들이며, 형제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한 문장 속에는, 숨이 막힐 듯한 준비의 시간과, 문이 닫힌 뒤 들려왔을 폭우 소리, 그리고 물 위에서 흘러간 긴 밤들이 함께 들어 있다. (참고: 창 7:13, 창 8:18)
어린 시절의 셈에 대해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상상해 보면, 그는 아버지 노아가 방주를 짓는 모습을 보며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주변 사람들은 비웃고, 가족은 손으로 나무를 나르고, 집 안에서는 매일 결정을 내려야 했을 것이다. 믿음 같은 선택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너라면 매일같이 조롱을 들으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을까. (참고: 창 6:13-22)
첫 번째 갈등은 아주 실감 나게 다가온다. 방주가 준비될 때, 밖의 세상은 여전히 평소처럼 돌아간다. 그런데 집 안에서는 “정말 이게 맞나” 같은 질문이 수없이 오갔을지 모른다. 셈은 그 질문을 품은 채로도, 가족 안에서 맡은 일을 계속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흔들림이 없어서가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붙들고 가는 태도다. 너는 흔들릴 때 누구의 목소리를 더 크게 듣니. (참고: 창 6:22)
그리고 물이 시작된다. 창문이 열린 하늘, 솟구치는 깊음의 샘, 그리고 사람들의 외침. 성경은 그 비극을 길게 묘사하지 않지만, 셈은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때의 선택은 “살아남는 것” 자체다. 살아남는 건 기쁨이면서도 부담이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사람은 이후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라면 그 책임을 어떻게 견뎠을까. (참고: 창 7:17-24)
물이 빠지고, 문이 열리며, 땅을 밟는다. 방주 밖 공기는 낯설었을 것이다. 세상은 텅 비었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셈에게는 또 하나의 선택이 시작된다. “이제 무엇을 세울 것인가.” 집을 먼저 세울까, 밭을 먼저 갈까, 제단을 먼저 쌓을까. 성경은 노아가 제단을 쌓았다고 말한다. 그때 셈도 곁에 있었을 것이다. 감사와 두려움이 섞인 자리에서, 그는 새 출발의 방향을 배웠을지 모른다. 너라면 새로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니. (참고: 창 8:20-22)
그런데 평온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예상 못 한 균열이 생긴다. 어느 날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장막 안에 누워 있는 일이 벌어진다. 이 장면이 왜 이렇게 마음을 불편하게 할까. 우리는 “위대한 사람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셈은 그 순간을 피할 수 없었다. 가족의 존경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너라면 존경하던 어른의 실수를 보았을 때, 그 사람을 한순간에 지워 버리니. (참고: 창 9:20-21)
함이 그 장면을 보고 밖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말한다. 말의 온도는 알 수 없다. 놀랐을 수도 있고, 비웃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분명하다. 수치가 밖으로 흘러나간다. 셈과 야벳은 그 소식을 듣는다. 여기서 중요한 갈등이 생긴다. “나도 보고 확인할까, 아니면 보지 않기로 할까.”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뭘까. 셈은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다른 길을 택한다. (참고: 창 9:22-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두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의 얼굴을 돌이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3, 개역개정)
이 장면에서 셈의 선택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다. 그는 아버지의 죄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을 택한다. 동시에 그는 형제의 말에 편승해 관계를 깨뜨리는 길을 피한다. 덮어 준다는 건, 무조건 감싸는 게 아니라 상처가 더 번지지 않게 막는 행위다. 너는 누군가의 실수를 들었을 때, 덮어 주는 사람인가, 퍼뜨리는 사람인가. (참고: 창 9:23)
노아가 깨어나고, 결국 말이 나온다. 축복과 저주가 섞인 예언 같은 문장이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사건의 결과를 보여 주지만, 그 모든 의미를 단정적으로 결론내리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맥락상, 이 집안은 그날 밤 이후로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셈에게는 또 하나의 무거운 선택이 놓인다. “나는 이 축복을 무엇으로 살 것인가.” 축복은 선물인데, 동시에 삶의 방향을 요구한다. 너라면 축복을 ‘편안함’으로만 쓰고 싶지 않겠니. (참고: 창 9:24-27)
노아의 말 가운데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한 관점으로는, 셈의 길이 단지 가문을 지키는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길이었다는 संकेत처럼 읽힌다. 하지만 셈이 늘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선택이 남길 후폭풍을 알면서도, 지금 해야 할 일을 했던 사람처럼 보인다. 너는 누군가를 위해 옳다고 믿는 선택을 했다가 오해받은 적이 있니. (참고: 창 9:26)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다시 흩어져 산다. 셈의 이름은 족보 속에서 더 자주 등장한다. 족보는 딱딱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게 붙여 둔 실”이다. 셈에게도 자녀들이 있고, 그 이름들이 기록된다.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이 이름들은 훗날 여러 민족과 지역으로 이어진다. 셈은 아마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홍수 이전의 폭력과 홍수 이후의 두려움을 함께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다. 너라면 아이에게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니. (참고: 창 10:21-22)
성경은 셈이 홍수 후 2년째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이후 오백 년을 더 살았다고 말한다. 숫자는 낯설지만, 의미는 선명하다. 그는 긴 세대의 다리였다. 한 사람이 오래 살았다는 기록은, 단순한 장수 자랑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셈은 젊은 세대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희망일까, 불안일까. (참고: 창 11:10-11)
또 하나의 큰 사건이 그 시대에 일어난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성을 쌓고,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며 “우리 이름을 내자”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셈이 그 현장에 있었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 시대를 살았고, 그 분위기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 관점으로는, 셈의 마음에는 이런 갈등이 있었을지 모른다. “함께 모여 안전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경계를 인정할 것인가.” 너라면 두려움 때문에 과도한 통제를 만들고 싶어진 적이 있니. (참고: 창 11:1-9)
언어가 갈라지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이 사건은 인간의 야망을 단순히 조롱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가 무너질 때 소통이 얼마나 쉽게 끊어지는지를 보여 준다. 셈의 가문 역시 그 변화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흩어지는 건 실패 같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셈은 가족을 이끌며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누구와 이웃이 될지, 어떤 문화를 받아들일지 매일 결정했을 것이다. 이동의 선택은 곧 정체성의 선택이다. 너는 낯선 환경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려놓니. (참고: 창 11:8-9)
셈의 계보는 계속 이어져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람, 곧 아브라함의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 셈의 이야기는 갑자기 밝아지는 듯하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평범한 날들이 있다. 누군가는 장사하며 먹고살고, 누군가는 아이를 키우고, 누군가는 관계를 맺고 끊는다. 셈은 그 긴 평범함을 통해 약속이 이어지는 길이 ‘특별한 한 순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준다. 너는 평범한 날들이 모여 만든 결과를 믿니. (참고: 창 11:12-26)
셈의 관계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형제들, 함과 야벳이다. 같은 배를 타고 살아남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미래를 만들지는 않는다. 가족은 늘 가까이 있지만, 그래서 더 많이 부딪힌다. 셈은 형제를 미워하는 대신, 자신이 지킬 선을 택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형제가 이렇게 했으니 나도 이렇게 하겠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믿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다. 너는 관계의 갈등 속에서 자기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기준을 세우니. (참고: 창 9:22-23)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은 ‘기억의 방식’이다. 홍수 이전의 세상이 어땠는지, 왜 심판이 왔는지, 그리고 새 세상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셈은 후손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했을까. 사람은 아픈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우기만 하면 같은 실수가 반복된다. 셈은 어쩌면 기억을 경계로 바꾸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지 모른다. 너라면 가족의 어두운 이야기를 아이에게 어느 정도까지 말하겠니. (참고: 창 9:1-7)
성경은 셈이 언제 어디서 살았는지, 어떤 집을 지었는지, 어떤 성격이었는지 길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기록이 적다고 해서 의미가 작은 건 아니다. 오히려 셈은 “이야기 뒤에서 길을 내는 사람”을 대표한다. 조용한 선택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한 세대 뒤에는 큰 방향이 된다. 너는 너의 선택이 당장 빛나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니. (참고: 창 11:10-11)
셈의 마지막에 대해 성경은 비교적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육백 년을 살고 죽었다. 그 문장에는 장대한 삶의 무게가 들어 있다. 그는 홍수 전후를 아는 세대였고, 언어가 갈라지는 시대를 지나, 아브라함의 조상으로 이어지는 긴 줄기의 초입을 지켰다. 많은 이들이 태어나고 떠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자리에서 끊어지지 않게 이어 주는 역할을 했다. 너라면 그 긴 시간의 끝에서 무엇이 가장 선명하게 남을까. (참고: 창 11:10-11)
마지막으로 셈이 남기는 여운은 이런 질문으로 이어진다. 큰 업적을 남기지 않아도, 가족의 수치를 덮는 한 번의 선택이 세대를 살릴 수 있을까. 한 관점으로는, 셈의 길은 “사람을 다시 세우는 방식”을 보여 준다. 누군가를 망가뜨려서 정의를 세우는 게 아니라, 덮어야 할 것은 덮고, 말해야 할 것은 책임 있게 말하는 길 말이다. 너는 오늘 누구의 이야기를 덮어 주고, 누구에게는 조용히 진실을 건넬 수 있겠니. (참고: 창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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