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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아벨의 죽음 이후, 아담과 하와의 집에 다시 들어온 숨 같은 이름, 셋. 성경은 그를 큰 영웅처럼 묘사하지 않지만, 믿음의 계보가 다시 이어지게 만든 조용한 시작점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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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아담과 하와의 아들로, 아벨의 죽음 뒤에 다시 이어진 생명의 줄처럼 등장한다. 성경은 그를 화려하게 꾸미지 않지만, 절망 뒤에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길을 내는 사람으로 남겨 둔다.

만약 네가 그 집의 문턱에 서 있었다면 어떨까. 사랑하던 이를 잃고, 가족이 갈라지고, 말조차 조심스러워진 집에서 다시 아기를 안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너는 그걸 기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셋의 이야기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짙은 공기 속에서 시작된다. 형 아벨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고, 형 가인은 땅을 떠돌게 되었고, 아담과 하와의 집에는 비어 있는 자리가 남아 있다. 성경은 그 슬픔의 길이를 자세히 세지 않지만, 그 집안의 밤이 얼마나 길었을지 우리는 조심스럽게 상상해볼 수 있다. (참고: 창 4:8-16)

그리고 어느 날, 하와가 셋을 낳는다. 그녀는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며 마음속에 꽂혀 있던 한 문장을 꺼내 놓는다. 그 말은 상처의 기록이면서도, 다시 시작하려는 선택이기도 했다. (참고: 창 4:25)

“하와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5-26, 개역개정)

여기서 첫 번째 선택이 보인다. 아담과 하와는 슬픔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슬픔만이 전부가 되게 두지 않기로 한다. 아이를 품는 일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다시 사랑할 용기를 내는 일이다. 너는 잃어버린 뒤에도 다시 누군가를 품을 수 있을까. (참고: 창 4:25)

셋은 아마도 자라면서 자신이 왜 이 이름을 받았는지 들었을 것이다. "대신"이라는 말은 때로 누군가를 눌러 버린다. 아벨을 대신한다는 말이, 셋에게는 비교의 눈길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두 번째 선택이 있다. 셋은 자신을 "대체품"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생명으로 살 것인지 마음속에서 길을 정해야 한다. 너는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라는 기대 앞에서 어떻게 숨을 쉬겠니. (참고: 창 4:25)

또 한 가지 그림자가 있다. 가인의 이야기는 집안의 금기처럼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금기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인의 표, 떠돎, 분노를 이야기하며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셋이 성장하면서 마주한 세 번째 선택은 이것이다. 그는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꿀지, 아니면 두려움에 끌려 서로를 의심하며 살지 결정해야 한다. 너라면 가족의 아픈 과거를 어떻게 다루겠니. (참고: 창 4:12-16)

성경은 셋의 어린 시절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상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 집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아담은 땅을 일구며 땀을 흘렸을 것이고, 하와는 아이를 키우며 기억과 현재 사이를 오갔을 것이다. 셋은 어른들의 표정으로 집의 분위기를 읽었을 것이다. 네 번째 선택은, 셋이 그 분위기 속에서 말을 배우는 방식이다. 그는 상처를 덮는 침묵을 택할 수도 있고, 상처를 안고도 하나님께 말하는 길을 배울 수도 있다. 너는 상처를 말로 꺼낼 때 어떤 두려움을 느끼니. (참고: 창 3:17-19)

셋이 성장해 가며 가장 현실적인 갈등도 찾아온다.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한다. 땅은 언제나 원하는 만큼 열매를 주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다섯 번째 선택이 생긴다. 그는 땅의 고단함에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을 원망할지, 아니면 고단함 속에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을지 선택해야 한다. 너는 일이 뜻대로 안 풀릴 때,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니. (참고: 창 3:17-19)

성경의 족보는 단순한 이름 나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이렇게 살았다"는 방향성이 숨어 있다. 셋에게도 삶의 흐름이 있다. 그는 105세에 아들 에노스를 낳는다. 긴 세월 속에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이다. (참고: 창 5:6)

여섯 번째 선택은 아버지가 되는 방식이다. 셋은 자신의 아버지 아담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전할지 선택한다. 에덴의 빛과 추방의 어둠, 실수의 무게와 자비의 여운을, 아이에게 겁주기로만 전할 수도 있다. 혹은 경계와 소망을 함께 담아,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있음을 전할 수도 있다. 너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니. (참고: 창 3:22-24)

그리고 성경은 짧지만 중요한 말을 남긴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문장이 셋 개인의 업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셋의 가정과 세대가 하나님을 찾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갔음을 암시하는 한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참고: 창 4:26)

여기서 일곱 번째 선택이 드러난다. 어떤 시대든 사람들은 바쁘다. 삶은 단순히 흘러가 버리기 쉽다. 그런데 "부른다"는 것은 시간을 떼어 내어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게 하는 일이다. 셋의 집안은 일상 속에서 그 선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너는 하루의 한가운데에서, 누구의 이름을 가장 자주 부르고 있니. (참고: 창 4:26)

셋에게는 관계의 선택도 있었다. 그는 아담의 아들이다. 아담은 인간의 첫 시작과 첫 상실, 첫 죄책감을 모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셋이 아담을 바라볼 때, 그는 "위대한 조상"이 아니라 약한 아버지로도 보였을 것이다. 여덟 번째 선택은 존경과 실망 사이에서 아버지를 대하는 방식이다. 너는 가까운 사람의 실패를 볼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니. (참고: 창 3:6-7)

또한 하와와의 관계도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와는 아벨을 잃었고, 가인을 떠나보냈고, 다시 셋을 품었다. 기쁨과 미안함, 분노와 후회가 섞인 눈물이 있었을지 모른다. 셋은 어머니의 감정을 받아 줄지, 아니면 그 감정에서 도망칠지 선택해야 한다. 아홉 번째 선택이다. 너는 누군가의 슬픔이 네게 다가올 때, 함께 앉아줄 수 있니. (참고: 창 4:25)

셋의 삶을 생각할 때 자주 놓치는 것이 있다. 성경은 "그가 몇 살에 누구를 낳았고, 그 후에 자녀를 더 낳았고, 그리고 죽었다"라고 말한다. 짧고 단정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수백 년의 평범한 날들이 있다. 그 날들은 믿음이 자라기도 하고, 식기도 하는 자리다. (참고: 창 5:3-8)

열 번째 선택은 그 평범함 속에서 나온다. 특별한 사건이 없을 때, 사람은 쉽게 무뎌진다. 셋도 긴 세월 동안 "처음 마음"을 잃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기억나고 족보에 남는 이유는, 누군가가 작은 신실함을 이어 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날에도 마음을 지킬 방법이 있니. (참고: 창 4:26)

셋의 가정이 커지면서 공동체도 넓어졌을 것이다. 가인의 후손들이 도시를 세우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흐름이 있는 것처럼, 셋의 계보는 또 다른 흐름을 보여 준다. 이것을 "선한 쪽, 악한 쪽"으로 단순히 갈라 말할 수는 없지만, 맥락상 두 계보의 색이 대비되어 보이기도 한다. 셋은 그 사이에서 열한 번째 선택을 한다. 세상 속에서 살되, 마음의 방향을 어디에 둘지 정하는 일이다. 너는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릴 때가 있니. (참고: 창 4:17-26)

에노스가 자라면서, 셋은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렸을 수 있다. 아들이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땅에서 힘들게 살아야 해요." 셋은 대답을 선택해야 한다. 열두 번째 선택이다. 그는 운명을 탓하며 낙담을 가르칠 수도 있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희망의 언어를 가르칠 수도 있다. 너는 어린아이의 질문 앞에서 어떤 말을 고르고 있니. (참고: 창 3:17-19, 창 4:26)

성경은 셋이 다른 자녀들도 낳았다고 말한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그 많은 자녀들도 각자의 성격과 갈등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셋은 부모로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열세 번째 선택은 가정 안에서 공정함과 사랑을 세우는 일이다. 상처의 역사가 있는 집안일수록, 작은 편애가 큰 균열로 번질 수 있다. 너는 관계에서 무심코 만든 차별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생각해본 적 있니. (참고: 창 5:7)

셋이라는 이름은 "세우다, 두다"의 느낌을 담고 있다고도 말한다. 무엇을 세우느냐가 중요하다. 그는 집을 세울 수 있고, 자존심을 세울 수도 있다. 열네 번째 선택은 자신을 세우는 방식이다. 셋이 자신의 이름을 "내가 해냈다"로 만들지, "하나님이 세우셨다"로 남길지의 선택이다. 너는 인정받고 싶을 때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세우니. (참고: 창 4:25)

시간이 흘러 아담의 죽음이 가까워지면, 셋의 마음도 복잡해졌을 것이다. 첫 사람의 마지막 숨은, 한 시대의 끝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열다섯 번째 선택은 떠나는 이를 붙잡지 못하는 순간에, 남은 이가 어떤 믿음을 선택하느냐다. 너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때, 무엇에 기대어 서고 싶니. (참고: 창 5:5)

셋은 오래 살았다. 성경은 그가 912세에 죽었다고 말한다. 숫자는 크지만, 그 의미는 단순히 "장수"가 아니다. 오랜 삶은 기회이기도 하고, 지루함이기도 하고, 때로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열여섯 번째 선택은 오래 사는 동안 마음이 굳어질 때, 다시 부드러워질 용기를 내는 것이다. 너는 오랜 반복 속에서 마음이 굳어질 때가 있니. (참고: 창 5:8)

셋의 마지막 날을 성경은 자세히 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상상할 뿐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의 이야기를 들려준 어머니 하와의 목소리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벨의 빈자리, 가인의 떠돎, 아담의 땀, 그리고 에노스의 손을 잡던 순간들. 열일곱 번째 선택은 마지막에 무엇을 붙들고 눈을 감느냐다. 너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기억을 붙들고 싶니. (참고: 창 4:25-26, 창 5:8)

셋은 "큰 사건"으로 기억되는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의 역사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거대한 영웅담 사이에서, 절망을 끝으로 만들지 않는 사람. 상실의 자리에서 다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 그들의 이름은 족보의 줄처럼 조용히 이어진다. (참고: 창 4:26)

한 관점으로는, 셋의 삶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이것이다. 너는 삶이 무너졌을 때, 무엇을 "다시 세우기"로 선택하겠니. 관계를, 기도를, 일상을, 혹은 마음의 방향을. 셋은 완벽한 답을 주기보다, 다시 시작하는 길이 있다는 여운을 남긴다. (참고: 눅 3:38)

그리고 셋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잠깐 스친다. 아주 짧게, 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줄로. 그 줄은 누군가의 화려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어 가시는 역사의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너는 네 삶의 줄이 어디로 이어지길 바라니. (참고: 눅 3:38)

  • 참고 구절: 창 4:25-26
  • 참고 구절: 창 5:3-8
  • 참고 구절: 창 3:17-24
  • 참고 구절: 창 4:8-16
  • 참고 구절: 대상 1:1
  • 참고 구절: 눅 3:38
  • 관련 인물: 아담, 하와, 아벨, 가인,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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