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바는 야곱의 집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시작했지만, 두 아들의 탄생으로 한 가족의 흐름을 바꾸는 인물이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이름보다 먼저 주어지는 역할 속에서도 사람이 어떻게 버티고 사랑하는지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누구의 선택으로 네 인생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자리에서 살게 된다면,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겠니.
실바의 이야기는 화려한 무대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길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조심스럽게 상상해볼 수 있는 건, 그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집 안에서 일하며 살아왔다는 점이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말은 나중에 나오는 삶. 누가 웃으면 따라 웃어야 하고, 누가 화를 내면 숨을 죽여야 하는 삶. 그런 자리에 서 있던 아이가 자라면, 스스로의 꿈을 길게 펼치기보다 오늘 무사히 지나가는 것을 먼저 배우게 되지 않을까.
그 집은 라반의 집이었다. 라반은 딸 레아를 야곱에게 시집보내며 여종 하나를 딸에게 붙여 준다. 그 여종이 실바다. 누군가에겐 선물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바에게는 선택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너는 이제 레아의 사람이다.” 그 한마디로 삶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 그때 실바는 무엇을 느꼈을까. 익숙한 마당을 떠나 낯선 텐트로 가는 길에서, 마음 한구석이 얼어붙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너라면, 네가 원하지 않은 이동을 명령받았을 때 무엇을 가장 먼저 챙겼을까. (참고: 창 29:24)
야곱의 집은 겉으로는 큰 가족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뜨거운 경쟁의 불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레아와 라헬, 두 자매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엇갈린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남편의 시선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다. 실바는 그 사이를 매일 오가며 살았을 것이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불씨가 되는 집에서, 여종의 걸음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때 실바의 첫 번째 큰 갈등은 이런 것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이 집에서 사람일까, 물건일까. 너라면 그런 질문을 어디에 묻어두고 하루를 버틸 수 있겠니.
시간이 흐르며 레아는 여러 아이를 낳는다. 집 안에는 아기 울음이 겹겹이 쌓인다. 그 과정에서 실바는 산모의 땀을 닦아주고, 뜨거운 물을 데우고, 젖먹이를 안아 달래며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레아의 몸이 잠잠해진다. 더는 아이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레아의 마음이 흔들린다. 사랑받기 위해, 자리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기 여종을 남편 야곱에게 준다. 실바에게는 가장 큰 파도가 밀려온다. 누군가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내가 내 몸까지 내어줘야 하는 순간. 실바는 거절할 수 있었을까.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 밤, 실바는 어떤 표정으로 야곱의 텐트 앞에 섰을까. 너라면, 네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길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겠니. (참고: 창 30:9)
여기서 실바의 두 번째 선택이 보인다. 선택이라고 부르기 어렵지만, 그녀는 그 상황을 “내가 끝내야 할 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마음속에서 작은 저항이 꿈틀거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의 꿈을 대신 살아야 하지. 그 질문은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으니 더 무겁다. 그리고 관계도 바뀐다. 레아는 실바를 통해 다시 자기 자리와 자존심을 세우려 하고, 라헬은 그 움직임을 보며 더 조급해졌을 수 있다. 야곱은 가족을 늘려가는 흐름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누구도 완벽히 평안하지 않은 집이다. 너라면, 이런 얽힘 속에서 누군가를 탓하기 쉬울까, 아니면 마음을 읽으려 애쓸까.
실바가 임신했을 때, 그녀의 몸은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품는다. 임신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위험이다. 여종의 임신은 더 그렇다. 아이가 태어나면 누가 엄마로 인정받는가. 아이가 아프면 누가 책임을 지는가. 실바는 배가 불러오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속삭였을지 모른다. “얘야, 무사히 나와다오.” 그런데 동시에 마음 한구석은 조심했을 것이다. 이 아이는 내 아이이면서도, 내 아이가 아닐 수 있다. 너라면, 사랑해야 하는데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을 어떻게 사랑하겠니.
마침내 아이가 태어난다. 레아가 아이의 이름을 “갓”이라 부른다. “복이 왔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여기서 실바는 세 번째 갈등을 마주한다. 아이를 낳은 사람은 실바인데,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레아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소유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 순간 실바는 기뻤을까, 서운했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아기의 손가락이 자기 손을 꼭 잡는 느낌은 분명히 엄마의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다른 사람이 그 아기를 “내 아들”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너라면, 내 품에서 나온 생명이 다른 이름으로 불릴 때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겠니. (참고: 창 30:10-11)
시간이 지나 실바는 또 한 번 아이를 낳는다. 이번에는 “아셀”이다. “행복하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다. 레아는 행복을 말한다. 하지만 실바의 행복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여종의 행복은 보통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허락받은 작은 평안’에 가까울 수 있다. 그래도 실바는 아셀을 안고 가만히 웃었을지도 모른다. 아기의 체온, 숨결, 밤마다 달래며 들었던 울음이 조금씩 잠잠해지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이때 실바의 네 번째 선택은, 아마 내가 가질 수 있는 사랑을 끝까지 사랑하기였을지 모른다. 너라면, 작고 제한된 자리에서도 사랑을 크게 할 수 있겠니. (참고: 창 30:12-13)
이제 야곱의 집에는 아이들이 많아진다. 레아의 아이들, 라헬의 아이들, 그리고 여종들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 아이들은 형제지만, 그들의 엄마들은 서로 다른 아픔을 품는다. 실바는 그 사이에서 다섯 번째 갈등을 겪었을 수 있다. “내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같은 무게로 사랑받을까.” 집안의 대화 속에서 누가 더 중심에 서는지, 누가 더 조심히 다뤄지는지, 실바는 매일 보았을 것이다. 그럴수록 실바는 더 조용히, 더 단단히 아이들을 지키려 했을지 모른다. 너라면, 내 아이가 비교당하는 장면을 볼 때 어떻게 반응하겠니.
라헬의 여종 빌하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두 여종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혹은 같은 처지라서 더 멀어졌을까. 실바가 빌하를 보며 느낀 감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저 사람도 선택권이 없었겠지.” 그러면서도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라는 분노가 올라올 수도 있다. 여섯 번째 선택은 여기서 나온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을 경쟁자로 볼 것인가, 동료로 볼 것인가. 너라면, 상처가 닮았다는 이유로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니, 아니면 더 멀어지겠니.
야곱의 가족이 라반의 집을 떠나려 할 때도 실바는 중요한 갈림길 앞에 선다. 떠난다는 건 새로운 자유일까, 더 큰 위험일까. 길 위에서는 먹을 것도, 잠자리도, 안전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남아도 실바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실바는 가족과 함께 길을 나선다. 그 길에서 그녀는 일곱 번째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집의 일부로 남겠다.” 그녀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짐을 챙기고, 낯선 들판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너라면,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할 때 무엇이 네 발을 움직이게 하겠니. (참고: 창 31장 전후)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 야곱은 에서를 만날 두려움에 흔들린다. 가족은 둘로 나뉘어 배치되고, 누가 앞에 서고 누가 뒤에 서는지가 정해진다. 그 순간 실바의 마음도 흔들렸을지 모른다. 위험이 오면 누가 먼저 보호받을까. 누가 먼저 희생될까. 여종의 아이들은 어디에 놓일까. 여덟 번째 갈등은 아주 현실적이다. “위기의 순간, 나는 어떤 값으로 계산될까.” 너라면, 사랑이 아니라 계산으로 정해지는 자리에서 어떻게 숨을 쉬겠니. (참고: 창 33장 전후)
시간이 더 흐르고, 아이들은 자란다. 갓과 아셀도 형들과 어울리며 성장한다. 실바는 아마도 아이들이 서로 부딪히고 화해하는 장면을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바는 아홉 번째 선택을 계속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 “너는 네 엄마가 여종이라서…” 같은 말은 아이들을 찢을 수 있다. 반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상처로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실바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을지 모른다. 너는 너다. “네 가치는 네 출신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너라면, 아이에게 어떤 한 문장을 남기고 싶니.
요셉의 이야기가 집안을 뒤흔들 때, 실바는 또 다른 갈등의 한복판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셉을 향한 편애, 형들의 질투, 그리고 결국 요셉이 사라지는 사건. 성경은 실바가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지만, 그 집에 있던 사람이라면 그 공기의 무게를 모를 수 없다. 실바의 열 번째 갈등은 이런 것이었을 수 있다.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해야 하는가.” 여종이 집안의 큰 결정에 끼어들 수는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은 어땠을까. 아이 하나가 사라지는 일을 보며, 자기 아들 갓과 아셀은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며, 실바는 밤마다 불안했을지 모른다. 너라면, 큰 잘못을 막을 힘이 없을 때 무엇을 할 수 있겠니. (참고: 창 37장 전후)
세월이 더 흘러 기근이 찾아오고, 가족은 곡식을 찾아 애굽으로 향한다. 이 이동은 실바에게 열한 번째 선택을 요구한다. “이제 늙어가는 몸으로도 다시 길을 갈 것인가.” 그러나 길을 가지 않으면 가족은 굶는다. 실바는 자식들과 손주들의 등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애굽은 낯선 땅이다. 언어도, 문화도, 권력도 다르다. 하지만 살기 위해선 들어가야 한다. 너라면, 생존을 위해 낯선 땅을 선택할 때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겠니. (참고: 창 46장 전후)
애굽에 도착해 가족이 자리 잡을 때, 성경은 실바의 아들들이 야곱의 가족으로 기록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작은 문장 같지만, 실바에게는 큰 의미일 수 있다. 여종의 아들들이 “가족”의 이름으로 불린다. 실바의 열두 번째 갈등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나는 여전히 여종인가, 아니면 이 이야기의 일부인가.” 성경은 그녀의 죽음을 길게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성경은 실바의 마지막 날을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긴 길을 끝까지 함께 걸었다면, 그녀도 조용히 늙어가며 아이들과 손주들 곁에서 삶을 마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녀가 남긴 것은 큰 연설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이다.
실바의 퇴장은 무대 뒤처럼 조용했을지 모른다. 어느 날 그녀의 손이 더는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고, 눈이 침침해지고, 숨이 가빠질 때가 왔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누구의 손을 잡았을까. 갓과 아셀, 혹은 손주들의 손.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내가 선택할 수 없던 길도 있었지만, 내가 사랑할 수 있던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다.” 너라면, 네 인생의 끝에서 무엇을 “내가 했다”라고 말하고 싶니.
실바가 남긴 여운은 한 관점으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 이야기는 늘 앞줄에 선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름이 작게 적힌 사람, 선택권이 좁았던 사람, 말이 적었던 사람도 그 이야기의 일부다. 실바를 통해 우리는 묻는다. 내가 작게 보이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일을 이어가실까. 그리고 또 묻는다. 너는 오늘, 너에게 주어진 작은 자리에서 어떤 사랑을 선택하겠니.
레아가 출산이 그친 것을 보고, 자기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실바가 또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내가 행복하도다 하니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창 30:9-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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