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닥사스다는 성벽을 직접 쌓은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다시 쌓을 수 있게 문을 열어 준 왕으로 기억된다. 한 제국의 권력 한가운데서 나온 허락과 멈춤의 명령이, 먼 땅의 작은 공동체에게는 숨을 쉬게도 하고 숨이 막히게도 했다.
만약 네가 왕의 자리 근처에서, 누군가의 간절한 부탁과 누군가의 날카로운 고발을 동시에 듣는다면 어떻게 할까. 어느 쪽의 말이 진실처럼 들릴 때, 너는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릴까.
그의 시작은 성경이 길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가 페르시아 왕궁이라는 거대한 돌과 금속의 세계 속에서, 매일 수많은 보고를 받고 수많은 얼굴을 지나치며 살아갔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왕궁의 복도는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은 늘 긴장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민족을 다스리는 제국의 중심에서는, 작은 소문 하나가 반란이 되고, 작은 허락 하나가 국경을 흔든다.
그 첫 번째 갈등은 바로 “안정”이었다. 왕의 자리는 화려하지만 불안정하다. 왕이 바뀌는 때마다 사람들의 충성은 시험을 받는다. 아닥사스다는 제국의 안정과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떤 목소리는 가까이 두고 어떤 목소리는 멀리해야 했다. 그 선택은 곧 사람의 목숨과 지방의 미래로 이어진다. 너라면, 아직 자리가 굳지 않았을 때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니.
그리고 제국은 늘 밖에서 흔들린다. 먼 지역의 소요, 세금에 대한 불만, 통치자의 교체. 성경은 그 전부를 말하지 않지만, 왕의 하루가 보고서의 무게로 채워졌음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 두 번째 선택이 나온다. “강하게 누를 것인가, 시간이 지나길 기다릴 것인가.” 강함은 즉시 조용하게 만들지만 마음속 불씨를 남기고, 기다림은 위험을 키울 수 있다. 그는 어느 날은 강하게, 어느 날은 기다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너는 힘이 있을 때, 빠른 해결과 깊은 상처 중 무엇을 더 두려워하니.
이때 예루살렘 이야기가 왕의 귀에도 들어온다. 돌아온 유다 사람들은 삶을 다시 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땅에는 이미 오래 살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서로의 기억과 상처가 얽혀 있었다. 누군가는 “재건”을 꿈으로 말했고, 누군가는 “재건”을 위협으로 말했다. 세 번째 갈등이다.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일이, 제국에 반항이 되는가.”
그런 보고가 왕 앞에 놓였을 때, 가장 쉬운 길은 의심하는 쪽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국의 왕에게는 ‘문제의 가능성’ 자체가 위험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시기에 왕에게 편지가 올라갔고, 그 결과 예루살렘의 공사가 멈추었다고 전한다. (참고: 스 4:7-23) 그 순간을 상상해 보자. 멈춘 현장에는 먼지와 한숨이 남는다. 사람들은 “우리가 뭘 잘못했지” 하고 서로를 바라본다. 왕에게는 행정적인 결정일지 몰라도, 현장에서는 삶이 멈춘다. 너라면, 멀리 있는 사람들의 눈물까지 상상하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보고서의 결이 달라진다. 어떤 지역은 조용해지고, 어떤 지역은 오히려 불만이 커진다. 그리고 왕궁에는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에스라. 그는 단순한 청원자가 아니라, 율법에 밝은 서기관으로 소개된다. (참고: 스 7:1-6) 네 번째 선택은 “누구를 믿을 것인가”였다. 에스라는 무기를 들고 온 사람이 아니라, 말씀과 질서를 들고 온 사람이다. 왕의 입장에서는 묻게 된다. “이 사람이 세금을 줄이거나 반란을 일으키는가, 아니면 오히려 지역을 안정시키는가.”
왕은 에스라에게 권한을 준다. 돌아가서 하나님 율법을 가르치고, 질서를 세우고, 예배의 기구와 재정을 가지고 가게 한다. (참고: 스 7:11-26) 다섯 번째 갈등은 “지원의 크기”다. 너무 적게 주면 목적이 흔들리고, 너무 많이 주면 다른 지역이 시기하며 정치가 불편해진다. 왕은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계산 속에는 뜻밖에도 “경외”라는 감정이 섞여 있는 듯 보인다. 성경의 문장들은 왕이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는 장면을 남긴다. (참고: 스 7:23) 왕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는 신앙이 정치로만 소비되는 것을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너라면, 신앙의 말을 권력의 도구로 쓰지 않으면서도 정책을 세울 수 있을까.
여기서 관계의 변화가 생긴다. 유다 공동체는 왕을 ‘우리 편’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왕은 제국의 왕이고, 필요하면 언제든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불안과 기대 사이에서 공동체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에스라의 발걸음에는 책임이 묻어 있다.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잘못하면 우리 모두가 다시 멈춘다.” 너라면, 누군가의 큰 도움을 받았을 때 그 도움을 빚처럼 두려워하며 살겠니, 선물처럼 감사하며 살겠니.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왕의 곁에 있다. 느헤미야. 그는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나온다. (참고: 느 1:11) 술을 맡는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왕의 생명과 가장 가까운 자리다. 작은 표정 하나로도 왕의 마음을 읽어야 하고, 작은 독에도 왕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여섯 번째 갈등은 느헤미야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슬픔을 숨길 것인가, 드러낼 것인가.” 왕 앞에서 슬픈 얼굴은 위험하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얼굴에 근심이 드러난다. (참고: 느 2:1-2) 너라면, 권력 앞에서 네 상처를 숨기겠니,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겠니.
왕은 묻는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 질문은 부드럽지만, 사실은 칼날 같은 질문이다. 원하는 것을 말하는 순간, 너는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온다. 느헤미야는 기도하고 말한다.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게 해 달라.” (참고: 느 2:4-5) 일곱 번째 선택은 왕의 선택이다. “보내 줄 것인가, 붙잡아 둘 것인가.” 술 맡은 관원은 왕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보내는 것은 손해다. 하지만 보내지 않으면 그의 충성은 시들 수 있다. 왕은 보내기로 한다. 기간도 정해 준다. (참고: 느 2:6) 관계는 여기서 더 깊어진다. 느헤미야는 왕의 신뢰를 손에 쥐고 떠난다. 너라면,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결정을 할 때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니.
왕은 문서도 준다. 길을 안전하게 지나게 하는 조서, 나무를 공급받게 하는 허가. (참고: 느 2:7-8) 여덟 번째 갈등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재건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 같은 이름이 나온다. (참고: 느 2:10, 19) 그들은 단지 공사를 싫어한 게 아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재건은 돌을 쌓는 일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다시 배치하는 일이기도 하다. 너라면, 누군가의 회복이 내 자리의 흔들림이 될 때 어떤 마음이 올라오니.
느헤미야는 밤에 성을 둘러본다. (참고: 느 2:12-15) 아홉 번째 선택은 “방법”의 선택이다. 공개적으로 시작하면 반대가 커지고, 조용히 준비하면 의심이 생긴다. 그는 먼저 현장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그 다음에 말한다. “일어나 건축하자.” (참고: 느 2:17-18) 이때 공동체의 감정이 움직인다. 수치가 결심으로 바뀌고, 절망이 역할로 바뀐다. 너라면, 무너진 자리를 다시 세울 때 먼저 해야 할 한 가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그러나 반대는 더 교묘해진다. 조롱, 협박, 내부 분열. (참고: 느 4장) 열 번째 갈등은 “두 손의 균형”이다. 한 손에는 일을, 한 손에는 무기를 든다. 사람들은 피곤해지고, 마음은 날카로워진다. 그때 느헤미야는 공동체 안의 억울함도 다룬다. 가난한 사람들이 빚 때문에 울고, 부유한 사람들이 그 틈을 이용한다. (참고: 느 5장) 재건의 적은 밖에만 있지 않다. 너라면, 큰 목표를 향해 갈 때 공동체 안의 상처를 “나중에”로 미루겠니, 지금 다루겠니.
이 모든 소식이 왕에게도 들어갔을 것이다. 제국의 왕은 늘 결과를 본다. 공사가 잘 진행되는지, 세금은 제대로 들어오는지, 반란의 기미는 없는지. 여기서 열한 번째 선택은 “계속 신뢰할 것인가”다. 반대자들은 분명 왕에게도 말을 걸었을 것이다. “저들이 성을 세우면 왕을 배반할 것입니다.” 옛날 편지들이 다시 떠오를 수 있다. 그런데도 재건은 이어진다. 성벽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은, 어떤 의미에서는 왕의 ‘신뢰가 유지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고: 느 6:15-16) 너라면, 한 번 의심했던 대상을 다시 믿어 주는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느헤미야는 왕에게 돌아가기도 한다. “얼마 후에 내가 왕에게 돌아갔다”는 짧은 문장이 있다. (참고: 느 13:6) 열두 번째 갈등은 “끝까지 책임질 것인가”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은 느슨해지고, 다시 예전 습관이 올라온다.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정리하는 장면은, 허락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허락은 문을 열어 주지만,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싸움이다. 너라면, 누군가를 도와 준 뒤 그 일이 잘 굴러가도록 끝까지 관심을 두겠니, 한 번 도와줬으니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겠니.
아닥사스다의 인생에서 확실한 마지막 장면을 성경은 길게 남기지 않는다. 그의 죽음, 그의 말년, 그의 후계 문제는 성경의 관심 밖에 있다. “성경은 여기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선택들이 사람들의 삶에 남긴 흔적을 볼 수 있다. 어떤 날의 서명, 어떤 날의 허락, 어떤 날의 멈춤. 그것들은 먼 도시의 돌담과 사람들의 눈물로 이어졌다.
그를 바라보며 우리는 조심스럽게 한 관점을 붙잡을 수 있다. 하나님 이야기는 종종 왕좌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왕좌 안에서도 길이 열린다. 그렇다고 권력을 아름답게 포장할 필요는 없다. 왕의 결정에는 늘 제국의 계산이 섞인다. 그러나 그 계산의 틈 사이로 누군가의 회복이 들어오기도 한다. 너는 지금 누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니, 그리고 너는 누군가에게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리에 있니.
마지막으로, 아닥사스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너는 힘을 가졌을 때 무엇을 허락할 것인가, 무엇을 멈출 것인가.” 허락은 책임을 낳고, 멈춤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래서 더 어렵다. 그래서 더 기도하게 된다. (참고: 느 2:4)
“그 왕이 이르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내가 왕에게 아뢰되…” (느 2:4-5, 개역개정)
- 스 4:7-23
- 스 7:11-26
- 느 1:11
- 느 2:1-8
- 느 2:10, 17-18
- 느 4장
- 느 5장
- 느 6:15-16
- 느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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