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볼로는 말과 성경에 능한 교사였고, 교회가 성장하는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붙드는 힘을 가졌지만, 그 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까지 배워야 했던 인물이다.
만약 네가 회당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듣는 순간 마음이 끌릴 만큼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앞에서 예수를 이야기한다면, 너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를까?
아볼로의 이름이 처음 등장할 때, 성경은 그의 출생 연도나 가정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를 “알렉산드리아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지식과 언어가 모이는 큰 도시였다. 히브리 전통을 가진 유대인들도 많았고, 헬라어 성경을 읽고 토론하는 분위기도 자연스러웠다. 성경은 여기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전해지는 배경을 조심스럽게 상상해보면, 아볼로는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 자주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많다는 건 선물일 수도 있고, 동시에 시험이 될 수도 있다. 배움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까, 교만하게 만들까 하는 질문은 늘 따라온다. 너라면 그렇게 큰 도시에서 무엇을 붙들고 자랐을까? (참고: 행 18:24)
아볼로에 대해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첫 선택이 있다. 그는 “성경에 능통”했고, “말을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는 이미 갈등이 숨어 있다. 말을 잘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런데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 늘 진리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아볼로는 그 능력을 어디에 쓰기로 선택했을까? 그는 주목받는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너는 네가 잘하는 것을 사람을 세우는 데 쓰고 있나, 아니면 인정받는 데만 쓰고 있나? (참고: 행 18:24)
성경은 아볼로가 “주에 대하여 열심”이었다고 말한다. 열심은 참 좋다. 그런데 열심은 방향이 맞아야 한다. 성경은 그가 예수에 대해 말했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중요한 갈등이 드러난다. 그는 예수를 말할 만큼 진심이었지만, 어떤 부분은 아직 더 배워야 했다.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기 쉬운 순간이다. 너도 혹시 “나는 이미 다 알아”라는 마음으로 멈춰선 적이 있나? (참고: 행 18:25)
아볼로는 에베소의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의 논리와 열정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프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지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아볼로를 비난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지도 않는다. 성경은 그들이 아볼로를 “데려다가” 더 정확하게 하나님의 도를 풀어 주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볼로의 큰 선택이 나온다. 잘나가는 설교자가 조용히 배우는 자리로 내려갈 수 있을까? 너라면 누군가가 “조금 더 정확히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다”라고 말할 때, 마음이 열릴까 닫힐까? (참고: 행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프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행 18:26, 개역개정)
이 장면은 짧지만 깊다. 아볼로가 그 자리에서 “나는 맞아”라고 고집했다면, 그의 영향력은 커질수록 위험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배움의 손을 잡는 쪽을 선택한다. 그 선택은 지식이 아니라 인격의 선택이다. 아볼로는 아마도 부끄러웠을 수 있다. 자신이 열심히 말해 온 것에 빈틈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그가 그 부끄러움을 견딜 때, 그는 더 안전한 교사가 된다. 겸손은 은사를 지키는 울타리가 된다. 너는 누군가의 조용한 조언을 들을 용기가 있나? (참고: 행 18:26)
그 다음 선택은 이동이다. 아볼로는 아가야로 가고 싶어 한다. 누군가의 손길로 더 정확해진 그는, 이제 더 넓은 자리에서 섬기고자 한다. 에베소의 형제들은 그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편지를 써서 그를 환영해 달라고 부탁한다. 사람을 세우는 공동체는 혼자 세워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은사가 교회 전체의 신뢰 속에서 움직인다. 아볼로는 혼자 빛나는 무대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길을 택한다. 너는 네가 하는 일을 혼자 증명하려고만 하지는 않나? (참고: 행 18:27)
아가야, 특히 고린도 같은 도시에서 아볼로는 큰 역할을 한다. 성경은 그가 은혜로 믿게 된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고 말한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흥미롭다. 그는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토론하며 유대인들을 “힘 있게 반박”했고, 성경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갈등이 있다. 논쟁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상처 입힐 수도 있다. 아볼로는 승부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논증을 선택했을까? 너는 논쟁을 할 때 이기려는 마음이 더 큰가, 살리려는 마음이 더 큰가? (참고: 행 18:28)
고린도에서 교회가 자라며, 또 다른 문제도 자란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붙들고 갈라지기 시작한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라는 말이 나온다. 이때 아볼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누군가는 “내 이름으로 사람이 모인다”는 것을 달콤하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곧 독이 된다. 아볼로의 이름이 교회의 분열을 설명하는 표지판처럼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우상처럼 붙들 때, 지도자는 가장 아픈 자리에 선다. 너는 누군가를 하나님 자리까지 올려놓고 있지는 않나? (참고: 고전 1:12)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아볼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볼로를 동역자로 묶어 말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는 비유가 나온다. 이 말은 아볼로에게도 큰 보호가 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이다. 아볼로에게도 선택이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싸울 때, 그는 더 강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혹은 뒤로 물러나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너라면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며 편을 갈라 세울 때, 그 칭찬을 어떻게 처리하겠나? (참고: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6, 개역개정)
이 비유 속에서 아볼로는 “물을 주는 사람”이다. 물을 주는 일은 조용하고 꾸준하다. 심은 것이 자라도록 돌보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심은 사람”이나 “눈에 띄는 사람”을 더 크게 보려 한다. 아볼로가 이 말을 들을 때, 자신의 역할이 작아 보이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까? 혹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을까?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는 고백은, 은사 있는 사람의 불안을 낮추고, 공동체의 경쟁을 멈추게 한다. 너는 결과를 쥐려고 애쓰다가 지쳐본 적이 있나? (참고: 고전 3:7)
또 하나의 선택은 “내가 누구의 사람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나온다. 고린도 사람들은 지도자를 기준으로 자신을 정의하려 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지도자 소유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볼로 역시 이 진리를 받아들여야 했다. 사람들은 지도자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도자가 그 기대를 다 받아주면, 교회는 더 약해진다. 아볼로는 사람들의 기대를 하나님께 돌려보내는 길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너는 누군가의 기대를 다 떠안고 버티다가 관계가 흔들린 적이 있나? (참고: 고전 3:21-23)
시간이 흐른 뒤,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가 주기를 권한다. 그런데 아볼로는 “지금은 갈 마음이 없다”라고 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묘한 여운을 준다. 왜 그는 가지 않았을까? 성경은 이유를 확정해 주지 않는다. 가능한 해석으로는, 그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더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을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사역의 책임이 있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아볼로가 자신의 인기나 요청에 끌려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지 않음도 용기일 수 있다. 너라면 누군가가 “제발 와서 해결해 달라”라고 할 때, 언제 가고 언제 멈추겠나? (참고: 고전 16:12)
바울이 디도서에서 아볼로의 이름을 다시 언급할 때, 아볼로는 여전히 사역의 길 위에 있다. 거기에는 제나라는 율법사도 함께 나온다. 바울은 그들이 부족함이 없도록 도우라고 말한다. 이 짧은 문장은 아볼로가 일회성 스타가 아니라, 오래 걷는 사역자였음을 보여준다. 눈에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계속 움직이며 사람을 돕는 삶이다. 너는 오래 걸을 수 있는 길을 택하고 있나, 아니면 빨리 빛나는 길만 찾고 있나? (참고: 딛 3:13)
아볼로의 마지막 기록은 이렇게 조용하다. 어디서 죽었는지, 어떤 노년에 이르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성경은 여기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아볼로는 아마도 여러 도시에서 성경을 풀어 주고, 교회를 세우며, 이름이 아니라 복음이 남도록 애썼을 것이다. 그는 프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배운 그 조용한 태도를 오래 품었을지도 모른다. 은사와 겸손이 함께 가야 교회가 안전해진다는 것을, 그의 삶 자체가 보여준다.
아볼로를 생각하면 이런 여운이 남는다. 말이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 말에만 끌리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그 말 잘하는 사람을, 조용히 배우는 자리로 먼저 부르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의 인격을 다듬어,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통로로 쓰신다. 가능한 한 관점으로는, 아볼로의 가장 큰 승리는 회당의 토론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배움 앞에서 자신을 낮춘 순간에 있었다. 너는 오늘 무엇 앞에서 조금 더 배우겠나?
- 행 18:24-28
- 행 19:1
- 고전 1:10-13
- 고전 3:5-9
- 고전 4:1-2
- 고전 16:12
- 딛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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