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은 떠나고, 기다리고, 다시 선택하는 사람이다. 한 관점으로는 그의 이야기가 성경의 큰 약속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중심 줄기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만약 네가 모든 게 익숙한 집과 가족을 뒤로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길을 나서야 한다면, 너는 그 발걸음을 떼겠니?
성경은 아브람의 어린 시절을 길게 들려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처음 만나는 그는 갈대아 우르라는 도시의 공기 속에 서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거래가 오가고, 밤이면 하늘의 별이 유난히 또렷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그는 데라의 아들로, 사래의 남편으로, 롯의 삼촌으로 불린다. 이름이 주는 무게는 아직 작아 보이지만, 그의 삶은 이미 관계로 묶여 있다. 가족의 기대, 고향의 안전, 앞으로 태어날 자식에 대한 막막함까지. (참고: 창 11:26-32)
그리고 어느 날, 그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름이 찾아온다. 떠나라는 말이다. 떠나되, 단순한 이사처럼 편한 떠남이 아니라, 정체성과 안전을 함께 내려놓는 떠남이다. 무엇이 가장 흔들리기 쉬운가 하면, 사람은 늘 익숙한 것에 기대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아브람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선택이 생긴다.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 그는 결국 길을 택한다. 이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이 ‘내가 만든 계획’이 아니라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는 형태를 띠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표정은 어땠을까. 사래는 속으로 어떤 계산을 했을까. 롯은 삼촌을 따라가며 무엇을 기대했을까. 너라면 네 가족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도 떠날 수 있겠니? (참고: 창 12:1-5)
길은 곧바로 목적지로 데려가지 않는다. 하란에 머무는 시간이 있다. 잠시 멈추는 그 시간에는 사람의 마음이 자주 바뀐다. 다시 돌아갈 핑계가 생기기도 하고, ‘여기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타협이 스며들기도 한다. 성경은 그 긴 머뭄의 감정을 다 쓰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데라가 세상을 떠난 뒤, 아브람은 다시 길을 잇는다. 두 번째 선택이다. 멈춘 자리에 눌러앉을 것인가, 다시 약속의 방향으로 걸을 것인가. 그는 다시 걷는다. 너라면 멈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어디서 찾겠니? (참고: 창 11:31-32, 창 12:4-6)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섰을 때, 땅은 비어 있지 않았다. 이미 사람들이 살고, 이미 힘의 질서가 있었다. 약속이 있다고 해서 현실이 갑자기 비켜 서 주진 않는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제단을 쌓는다. 한 관점으로는 이것이 ‘내가 여기서 무엇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를 몸으로 드러내는 행동이다. 눈에 보이는 안정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의지하겠다는 표시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삶은 시험을 걸어 온다. 기근이 닥친다. 배가 고프면, 믿음은 머리가 아니라 위장으로 흔들린다. 세 번째 선택이 생긴다. 머물며 버틸 것인가, 내려가 살아남을 것인가. 그는 애굽으로 내려간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곳에서 그의 두려움이 더 큰 문제로 자라난다. 너라면 굶주림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겠니? (참고: 창 12:6-10)
애굽에 가까워질수록 아브람의 마음은 불안해진다. 사래가 아름답다는 말이 그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위험으로 들린다. 그래서 그는 사래에게 누이라고 말해 달라 한다. 네 번째 선택이다. 진실로 서서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거짓으로 위험을 피할 것인가. 이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거짓이 관계를 어떻게 깨뜨리는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버려졌다는 느낌이었을까. 결국 사래는 바로의 집으로 들어가고, 아브람은 안전을 얻는 듯 보이지만 마음은 더 작아진다. 그리고 재앙이 닥쳐 상황이 드러난다. 그는 수치와 함께 애굽을 떠난다. 너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을 핑계로 진실을 굽히겠니? (참고: 창 12:11-20)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람은 부유해진다. 부유함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갈등의 불씨이기도 하다. 가축이 늘고, 종들이 늘고, 땅은 한정되어 있다.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 다섯 번째 선택이다. 힘으로 밀어붙일 것인가, 관계를 살릴 길을 찾을 것인가. 아브람은 놀라운 선택을 한다. 자기보다 어린 롯에게 먼저 땅을 고르게 한다. 이것은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을 막는 용기다. 롯은 눈에 좋아 보이는 평지를 택한다. 아브람은 상대적으로 덜 좋아 보이는 곳에 남는다. 서운함이 없었을까. ‘왜 나는 늘 져야 하지’라는 마음이 스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는 다툼 대신 평화를 택한다. 너라면 손해 같아 보이는 양보를 할 수 있겠니? (참고: 창 13:1-12)
롯이 떠난 뒤, 아브람에게는 조용한 허전함이 찾아올 수 있다. 가족이 줄어든 빈자리, 함께 웃던 사람이 사라진 공기. 그런데 그 조용함 속에서 약속은 다시 들린다. 땅을 보여 주며 “내가 주겠다”는 말이다. 여기서 여섯 번째 선택이 있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을 것인가, 시간이 걸리는 약속을 믿을 것인가. 아브람은 또 한 번 제단을 쌓고, 땅을 두루 다닌다. 믿음이란 가끔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매일의 발걸음에 담기는 것임을 보여 준다. 너라면 눈앞의 손해 때문에 약속을 놓아버리지 않겠니? (참고: 창 13:14-18)
평화가 찾아오나 싶더니, 전쟁의 소식이 들린다. 여러 왕들이 싸우고, 그 틈에서 롯이 포로로 잡혀 갔다. 이제 아브람은 다시 갈등 앞에 선다. 일곱 번째 선택이다. ‘이미 갈라졌으니 내 일이 아니다’라고 돌아설 것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구하러 갈 것인가. 그는 소수의 사람을 이끌고 밤길을 달려간다. 이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관계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책임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는 롯을 구해 돌아오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은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너라면 손해만 남을 것 같은 책임을 감당하겠니? (참고: 창 14:1-16)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 아브람은 멜기세덱을 만난다. 축복의 말이 그에게 내려앉고, 아브람은 전리품의 일부를 드린다. 그리고 소돔 왕이 전리품을 가지라고 제안할 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여덟 번째 선택이다. 다른 사람이 주는 인정과 이득에 기대어 커질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손으로 서 있을 것인가. 사람이 주는 힘은 달콤하지만, 그 힘은 나중에 ‘빚’처럼 마음을 묶는다. 아브람은 그 빚을 거절한다. 너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순간 함께 따라오는 눈치를 이겨낼 수 있겠니? (참고: 창 14:17-24)
그럼에도 밤이 오면 두려움이 찾아온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아브람에게 주어졌다고 전한다. 두려움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브람의 가장 깊은 슬픔이 튀어나온다. ‘나는 자식이 없다.’ 약속은 큰데, 내 현실은 비어 있다. 아홉 번째 선택이 생긴다. 빈 현실을 보고 냉소할 것인가, 약속을 붙잡고 기다릴 것인가. 그 밤, 별을 보라는 말이 주어진다. 그리고 믿음이 ‘설명 가능한 확신’이 아니라 ‘붙잡는 선택’으로 표현된다. (참고: 창 15:1-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 12:1-3, 개역개정)
별 아래에서 믿음이 잠시 단단해졌다고 해서, 기다림이 쉬워지는 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다시 불안해진다. 사래도, 아브람도 지친다. 그래서 열 번째 선택이 나타난다. 기다림을 계속할 것인가, 스스로 약속을 앞당길 방법을 만들 것인가. 사래의 제안으로 하갈이 등장한다. 하갈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람이다. 관계는 복잡해지고, 집안의 공기는 날카로워진다. 하갈이 임신하자 사래는 상처받고, 아브람은 갈등을 중재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결국 하갈은 도망치고, 다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난다. 선택은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다시 선택을 요구한다. 너라면 조급함 때문에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지 않겠니? (참고: 창 16:1-16)
그 다음에야, 아브람의 삶에 큰 전환이 온다. 이름이 바뀐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열한 번째 선택이다. 새 이름이 준 책임을 받을 것인가, 익숙한 옛 자리에 남을 것인가.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내가 누구로 불릴 것인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할례라는 표징이 주어진다. 몸에 새기는 약속. 믿음이 머리로만 남지 않고 삶의 결에 들어오게 된다. 너라면 눈에 보이는 불편과 대가를 감수하면서까지 약속을 삶에 새기겠니? (참고: 창 17:1-14)
또 한 번 낯선 방문자들이 찾아와 웃음이 터진다. “내년에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 앞에서 사래는 웃는다. 그 웃음은 기쁨이라기보다, 오래 기다린 사람의 씁쓸한 반사일지도 모른다. 열두 번째 선택이 생긴다. 조롱하듯 웃을 것인가, 다시 기대해 볼 것인가. 사래의 웃음은 들키고, 대화는 정직해진다. 그 순간부터 집안에는 조용한 떨림이 생겼을 것이다. ‘정말일까.’ 너라면 오래 미뤄진 약속을 다시 믿을 용기가 있겠니? (참고: 창 18:1-15)
이후 아브라함은 또 다른 갈등의 자리로 들어간다. 소돔과 고모라의 소식이다. 그는 심판의 소문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열세 번째 선택이다. ‘나는 상관없다’며 외면할 것인가, 위험해 보이는 대화를 시작할 것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끈질기게 묻는다.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되느냐고.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결과를 조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붙잡으려는 마음이다. 너라면 누군가를 위해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니? (참고: 창 18:16-33)
그런데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또 반복된다. 그랄 땅에서 그는 다시 사라를 누이라고 말한다. 열네 번째 선택이다. 이전의 실패를 기억하고 달라질 것인가, 익숙한 두려움의 패턴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비멜렉의 집에 일이 생기며 진실이 드러나고, 아브라함은 또 한 번 부끄러움 앞에 선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사람도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시험이 다른 옷을 입고 다시 온다. 너는 반복되는 두려움 앞에서 어떻게 달라지겠니? (참고: 창 20:1-18)
마침내 이삭이 태어난다. 집안에는 웃음이 돌아오고, 사래의 마음에도 오래 굳었던 얼음이 녹는다. 그러나 기쁨이 커질수록 또 다른 갈등도 생긴다.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 사래와 하갈의 과거가 다시 떠오른다. 열다섯 번째 선택이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를 밀어낼 것인가, 모두를 붙잡으려다 더 큰 상처를 만들 것인가. 아브라함은 괴로워한다. 그는 아들 이스마엘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래의 두려움도 이해한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떠나고, 광야에서 다시 살 길을 얻는다. 이 장면은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누군가에게는 보호였고, 누군가에게는 상실이었다. 너라면 가족 안의 충돌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겠니? (참고: 창 21:1-21)
그리고 가장 떨리는 시험이 찾아온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이다. 열여섯 번째 선택이다. 내가 받은 약속의 핵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이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성경은 이 사건을 단순한 잔혹함으로 그리지 않고, 한 관점으로는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아브라함은 길을 떠나고, 산을 오르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삭의 눈빛은 어땠을까. 아브라함의 목은 얼마나 마르고 손은 얼마나 떨렸을까. 결국 그는 멈추라는 음성을 듣고, 다른 제물을 발견한다. 이 장면이 남기는 질문은 크다. 너라면 가장 소중한 것을 붙잡고 있는 손을, 믿음으로 펼 수 있겠니? (참고: 창 22:1-19)
세월은 흘러 사라가 세상을 떠난다. 이제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이를 땅에 묻어야 한다. 열일곱 번째 선택이다. 임시로 빌릴 것인가, 값을 치르고 땅을 살 것인가. 그는 막벨라 굴을 사서 장사를 지낸다. 이것은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니다. 약속의 땅에 ‘미래를 위한 작은 못’을 박는 행동이다. 아직 다 가진 건 아니지만, 그 땅에 묻히는 것으로 ‘나는 여기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너라면 상실 앞에서도 미래를 향한 결단을 할 수 있겠니? (참고: 창 23:1-20)
아브라함의 마지막 큰 걱정은 이삭의 길이다. 아들을 위해 아내를 찾는 일에 그는 종을 보내며 맹세를 시킨다. 열여덟 번째 선택이다. 불안해서 모든 걸 직접 통제할 것인가, 맡길 것은 맡기고 기도할 것인가. 그는 고향의 땅으로 돌아가 아내를 데려오되, 이삭은 그 땅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한다.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다. 너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위해, 내 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겠니? (참고: 창 24:1-9)
시간이 더 흐르고, 아브라함은 늙는다. 성경은 그의 마지막을 길게 꾸미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그가 장수했고, 숨을 거두었고,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장사했다고 말한다. 관계의 상처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장면에 두 아들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묘한 여운을 준다. 삶은 단순히 ‘잘했다, 못했다’로 정리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삶도 그렇다. 용기와 두려움이 함께 있었고, 믿음과 조급함이 번갈아 나타났고, 관계의 상처와 회복이 얽혀 있었다. (참고: 창 25:7-11)
그럼에도 한 관점으로는, 아브람의 여정은 이렇게 말해 준다. 믿음은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이라고. 넘어져도 다시 약속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 손해처럼 보여도 관계를 살리는 것, 두려움이 올라와도 다시 진실을 배우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붙잡고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지 않는 것. 너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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