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지에서 시작해 환상으로 끝까지 걸어간 사람, 에스겔은 무너진 나라의 잔해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떠나셨나?”라는 질문을 붙들고, 두려움과 소망 사이를 오가며 길을 보여준 선지자다.
만약 네가 낯선 땅에서 모든 걸 잃은 채 “이제 끝이야”라고 속삭이던 그 자리였다면, 하늘이 갑자기 열리고 불 같은 빛이 내려오는 장면을 견딜 수 있었을까?
에스겔의 첫 기록은 의외로 조용하다. 그는 원래 제사장 집안 출신으로 보인다. 성전에서의 일, 정결과 제사의 규례, 예배의 리듬이 그의 몸에 배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는 성전이 아니라 바벨론 땅, 그발 강가의 포로 공동체 한복판에 서 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 맞나?”라는 질문이 목구멍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참고: 에스겔 1:1-3)
그때 하늘이 열린다. 바람, 구름, 번쩍이는 불,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들. 바퀴가 바퀴 안에 있고, 어디로든 움직이며, 눈 같은 것들이 둘러 있다. 에스겔은 그 광경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계속 “~같았다” “~같이 보였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첫 번째 선택이 시작된다. 이해 못해도 도망칠 건가, 아니면 떨면서도 바라볼 건가? 그는 도망치지 않고 본다. (참고: 에스겔 1:4-21)
그가 바닥에 엎드렸을 때 들리는 음성은 달콤하지 않다. “가서 말하라.” 포로들은 이미 상처가 깊다.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많다. 그런데 선지자가 된다는 건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에스겔은 ‘사람이 원할 것’과 ‘하나님이 맡기신 것’ 사이에서 첫 갈등을 맞는다. 너라면 어느 쪽을 붙들었을까? (참고: 에스겔 2:1-7)
두 번째 선택은 더 낯설다.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이다. 말로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메시지를 자기 안에 들여보내라는 뜻처럼 들린다. 먹어보니 꿀같이 달다. 그런데 달콤함은 늘 쉬움을 뜻하진 않는다. 달게 받아들인 말씀을, 사람들이 쓰게 거절할 때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너라면 그때 “그럼 말 안 할래”라고 등을 돌리지 않을까? (참고: 에스겔 2:8-3:3)
그 후 에스겔은 일곱 날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 충격으로 굳어버린 사람처럼. 세 번째 선택이다. 바로 말로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충분히 애도하고 삼킬 시간을 가질 것인가. 그는 침묵을 선택한다.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무너진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일 수 있다. 너는 슬픔 앞에서 서두르는 편인가, 머무는 편인가? (참고: 에스겔 3:15)
침묵이 끝나자, “파수꾼”이라는 역할이 주어진다. 위험을 보면 알려야 한다. 알려도 듣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알려야 한다. 네 번째 선택이다. 듣지 않을 사람에게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소용없어” 하고 포기할 것인가. 에스겔은 부담스러운 책임을 떠안는다. 이 지점에서 그의 마음은 단단해지지만, 동시에 외로워진다. (참고: 에스겔 3:16-21)
그다음 이야기는, 선지자다운 ‘말’보다 더 이상한 ‘행동’으로 흐른다. 에스겔은 벽돌에 예루살렘을 그려놓고 포위전을 연출한다. 그리고 옆으로 누워 지내며, 정해진 분량의 음식만 먹는다. 다섯 번째 선택이자 갈등이다. 체면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메시지를 몸으로 보여줄 것인가. 그는 스스로를 ‘조롱받을 자리’에 놓는다. 너라면 모욕을 견딜 수 있을까? (참고: 에스겔 4:1-8)
정해진 음식과 물은 포로지의 고통을 넘어, 앞으로 닥칠 예루살렘의 기근을 암시한다. 여섯 번째 선택은 매일 반복된다. 하루하루 버티며 의미를 붙잡을 것인가, 아니면 “이게 무슨 소용이야” 하고 무너질 것인가. 에스겔은 버티는 동안, 아마 자기 몸도 약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메시지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임을 보여준다. (참고: 에스겔 4:9-17)
그리고 머리를 깎아 머리카락을 저울에 달아 나누고, 일부는 불사르고 일부는 칼로 치고 일부는 바람에 흩뿌린다. 일곱 번째 선택이다. 한 인간으로서 가장 아픈 방식으로 “우리가 이렇게 흩어질 수 있다”는 현실을 직면한다. 머리카락은 자존심이자 정체성 같기도 하다. 너라면 네 자존심을 내려놓고라도 경고할 수 있겠니? (참고: 에스겔 5:1-4)
포로 공동체의 장로들이 찾아와 묻는다. “우리에게 평안이 오나?” 그들은 위로를 원하지만, 에스겔은 위로를 값싸게 팔지 않는다. 여덟 번째 갈등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달콤한 대답’을 줄 것인가, 아니면 뼈아픈 진실을 말할 것인가. 그는 마음속 우상, 보이지 않는 배신을 꺼내 놓는다. 이때 관계는 멀어지고, 분위기는 얼어붙는다. 너라면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참고: 에스겔 14:1-5)
그의 환상은 성전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사람들이 숨겨둔 것’을 본다.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우상 숭배와 폭력, “우리가 들키지 않을 거야”라는 오만. 아홉 번째 선택이 된다. 보았던 것을 말해 공동체의 분노를 살 것인가, 아니면 입을 다물어 안전할 것인가. 그는 말한다. 말하는 순간, 그는 더 고립된다. (참고: 에스겔 8:1-18)
특히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영광이 떠나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성전을 버리신다는 선언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한 관점으로는, 하나님이 무심히 떠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완강함에 의해 밀려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열 번째 갈등이다.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절망을 퍼뜨릴 것인가, 아니면 그 장면이 던지는 경고를 붙들고 돌이킴을 촉구할 것인가. 너는 절망을 말하는 사람이 될까, 경고를 말하는 사람이 될까? (참고: 에스겔 10:18-19; 11:22-23)
에스겔은 또 한 번 ‘입이 묶이는’ 경험을 한다. 어떤 때는 말을 못 하게 되고, 어떤 때는 딱 필요한 말만 하게 된다. 열한 번째 선택이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것이 쉬울까, 아니면 말이 줄어드는 것 속에서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게 쉬울까. 그는 기다린다. 기다림은 때로 가장 어려운 순종이다. (참고: 에스겔 3:26-27)
그의 메시지는 “너희는 망한다”로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개인의 책임을 또렷하게 세운다. “아버지의 죄만 탓할 수 있나?” “나는 피해자라서 아무것도 못 하나?” 열두 번째 갈등이다. 운명론에 기대어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선택이 내일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것인가. 이 말은 듣는 이에게 위로이기도 하고 부담이기도 하다. 너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숨고 싶니, 일어서고 싶니? (참고: 에스겔 18:1-4, 30-32)
그리고 어느 날, 너무 개인적인 사건이 찾아온다. 그의 아내가 죽는다. 성경은 그의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명령은 너무 차갑게 들린다. “너는 애도하는 의식을 보이지 말라.” 열세 번째 선택이자 찢어지는 갈등이다. 사람으로서 울부짖을 권리와 선지자로서 표적이 되어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그는 말없이 서야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의 상실은 공동체의 상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너라면 사랑하는 이를 잃고도 ‘표적’이 될 수 있을까? (참고: 에스겔 24:15-24)
마침내 포로지에 소식이 도착한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그날은 ‘예고된 비극’이 현실로 떨어진 날이다. 열네 번째 선택이다. 이제라도 조롱하며 “내가 맞았지”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무너진 사람들 곁에서 함께 울며 다음 걸음을 찾게 할 것인가. 에스겔의 메시지는 여기서 방향을 바꾼다. 심판만이 아니라 회복이 본격적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참고: 에스겔 33:21-22)
그는 지도자들을 “목자”에 비유하며, 자신만 살찌우는 목자들을 꾸짖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목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열다섯 번째 갈등이다. 지도자에게 실망한 사람들은 냉소로 굳기 쉽다. 그러나 그는 냉소 대신, 새로운 돌봄의 약속을 건넨다. 너는 배신을 겪은 뒤에도 다시 신뢰를 배울 수 있을까? (참고: 에스겔 34:1-16)
이어지는 약속은 더 깊다. “새 마음, 새 영”이라는 말이 나온다. 돌 같은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워진다는 이미지. 열여섯 번째 선택이다. 상처를 갑옷 삼아 단단해질 것인가, 아니면 다시 느낄 용기를 낼 것인가. 감정이 살아나는 건 축복이지만, 동시에 다시 아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너는 어떤 마음을 갖고 싶니? (참고: 에스겔 36:26-27)
그리고 가장 유명한 환상 중 하나, 마른 뼈 골짜기다. 바람도, 살도, 생명도 없는 뼈들이 널려 있다. 하나님은 묻는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열일곱 번째 갈등이다. 현실을 보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질문은 에스겔의 눈을 ‘가능성’으로 돌려 세운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한다. 너라면 그 자리에서 “절대 안 돼”라고 말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참고: 에스겔 37:1-3)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 내가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 37:3, 5, 개역개정)
그 말이 선포되자 뼈들이 맞추어지고, 힘줄과 살이 오고, 마지막에 숨이 들어간다. 열여덟 번째 선택은 공동체를 향한다. 무너진 정체성을 “끝났다”로 확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세워질 수 있다고 말해줄 것인가. 에스겔은 포로들의 절망을 ‘뼈’로 보았고, 동시에 그 위에 ‘숨’이 임하는 장면을 보았다. 너는 누군가의 절망 앞에서 어떤 말을 건네는 사람이니? (참고: 에스겔 37:4-10)
그는 두 막대기를 하나로 붙이는 표적도 행한다. 흩어진 집안, 갈라진 공동체가 다시 하나 되는 그림이다. 열아홉 번째 갈등이다. 분열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화해를 위해 불편한 대화를 시작할 것인가. “하나 됨”은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상처를 다루는 용기다. 너라면 누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참고: 에스겔 37:15-17)
후반부에 나오는 ‘큰 전쟁’의 비전은 읽는 이에게 긴장을 준다. 어떤 이름들이 등장하고, 거대한 위협이 다가온다. 스무 번째 선택이 여기서 생긴다. 공포에 사로잡혀 오늘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주권을 놓지 않으신다”는 관점을 붙들 것인가. 에스겔은 공포를 조장하려는 듯 말하지 않고, 두려움 너머에 있는 통치를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너는 두려움이 올 때 어디에 시선을 두니? (참고: 에스겔 38:1-4; 39:21-22)
마지막으로 그는 성전과 땅의 회복을 길게 본다. 치수와 문, 제사와 강, 생명이 퍼져나가는 이미지. 스물한 번째 선택이다. 상징을 ‘현실 도피’로 비웃을 것인가, 아니면 상징이 건네는 “질서의 회복”이라는 희망을 붙들 것인가. 이 환상은 “과거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무너진 세계에 다시 거룩함과 생명이 흐르는 미래를 그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너는 회복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이니? (참고: 에스겔 40:1-4; 47:1-9)
에스겔의 마지막 기록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는 성경이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포로지에서 시작된 질문—“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나?”—는, 그의 삶을 통해 다른 질문으로 바뀐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다시 돌아갈 수 있나?” 너는 지금 어떤 질문을 붙들고 있니? (참고: 에스겔 43:1-5)
한 관점으로 에스겔이 남긴 가장 큰 여운은 이거다.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건물에만 갇혀 계시지 않고, 포로지의 강가에도 찾아오신다. 그리고 회복은 단순한 기분 전환이 아니라, 마음이 바뀌고 공동체가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다. 오늘 네 삶의 “그발 강가”는 어디일까? 그 자리에서도 하늘이 열릴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참고: 에스겔 1:1; 36:26-27)
- 참고: 에스겔 1:1-3
- 참고: 에스겔 2:8-3:3
- 참고: 에스겔 3:15-21
- 참고: 에스겔 4:1-17
- 참고: 에스겔 8:1-18
- 참고: 에스겔 10:18-19; 11:22-23
- 참고: 에스겔 18:30-32
- 참고: 에스겔 24:15-24
- 참고: 에스겔 33:21-22
- 참고: 에스겔 34:1-16
- 참고: 에스겔 36:26-27
- 참고: 에스겔 3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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