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말이 많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의 핵심을 묻는 사람이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오해받기 쉬운 자리에서 끝까지 남아 예수의 길을 곁에서 배운 인물로 기억된다.
만약 네가 사람들에게 계속 오해받는 이름을 가졌다면, 그 이름을 안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성경은 유다의 출생지를 자세히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명단 속에 그가 열둘 중 하나로 들어 있다는 사실이, 그의 삶이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는 힌트가 된다. 어느 날, 가족과 익숙한 동네의 길을 지나며 그는 마음속으로 계산했을지 모른다. 집에 남아 안전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이름도 얼굴도 크게 드러나지 않는 길에서 부름에 응답할 것인가. 그 선택은 작아 보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갈림길이다. 너라면 익숙함을 내려놓고 부름을 따라갈 수 있을까? (참고: 마 10:2-4)
그의 이름은 복음서에 여러 방식으로 기록된다. 어떤 곳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처럼 보이고, 어떤 곳에서는 “다대오”라는 이름이 함께 떠오른다. 성경은 그 이유를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름이 여러 번 불리는 삶은, 때로 정체성이 흔들리는 삶이기도 하다. 그는 아마 사람들의 호명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것인가. 그런데도 그는 그 흔들림을 핑계로 물러서지 않는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남아 있는 선택, 너도 해본 적 있지 않니? (참고: 눅 6:14-16, 막 3:18)
그리고 더 무거운 오해가 있다. “유다”라는 이름은 가룟 유다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차가운 그림자를 남긴다. 사도 유다는 그 그림자와 같은 이름을 지닌 채 걸어야 했다. 누군가가 “유다”라고 부를 때, 주변의 시선이 잠깐 얼어붙는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을까. 변명하며 소리쳤을까, 아니면 조용히 자신의 걸음을 지켰을까. 오해를 견디는 믿음은, 사실 말보다 더 큰 용기를 요구한다. 너는 오해받는 순간에 관계를 끊어버리니, 아니면 시간이 해명해주길 기다리니? (참고: 마 10:1-4)
제자들의 길은 화려한 행렬이 아니라 먼지 나는 길이었다. 배고픔, 피곤함, 사람들의 기대, 종교 지도자들의 날선 질문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런 날에는 누가 더 크냐는 다툼도 생긴다. “내가 더 인정받아야 해.” “나는 더 많이 희생했어.” 이런 말들이 돌 때, 유다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성경은 그의 감정을 적지 않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너는 인정받고 싶을 때, 어떤 방식으로 그 마음을 다루니? (참고: 막 9:33-35)
열둘이 파송될 때도, 유다는 선택 앞에 섰다. 예수는 그들을 보내며 기적 같은 일을 맡긴다. 병든 자를 돌보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라고 한다. 그런데 현장에 나가면 두려움이 먼저 올라온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거절하면 어쩌지.” 그때 유다는 도망치지 않고 작은 순종을 선택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빛이 바뀌고, 누군가의 몸이 회복되는 순간을 보며, 그는 자기 안의 믿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걸 느꼈을지 모른다. 너는 두려움이 생길 때, 발걸음을 멈추니 아니면 한 걸음이라도 내딛니? (참고: 마 10:5-8)
길 위에서 배운 것은 능력만이 아니다. 예수는 자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같은 질문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드러내게 하신다. 유다는 아마 말수가 적었을지라도, 마음속에서는 계속 싸웠을 것이다. 예수의 길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낮아짐과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는 방식이었다. 그 방식은 느리고 답답해 보일 때가 있다. 그때 유다는 자기 안의 조급함과 싸우며 예수의 리듬을 배우는 선택을 했을까. 너는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사랑의 속도를 지킬 수 있니? (참고: 마 16:13-16)
사람들이 예수를 떠나는 장면도 있다. 가르침이 어렵다고, 이해가 안 된다고 등을 돌리는 순간이다. 열둘에게도 선택의 문이 열린다. “너희도 가려느냐.” 성경은 유다의 대답을 기록하지 않지만, 그는 떠나지 않은 편에 남아 있다. 남아 있다는 것은, 모든 걸 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해가 부족해도 관계를 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모름을 안고 남는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너는 이해가 안 될 때 관계를 끊니, 아니면 질문을 들고 남아 있니? (참고: 요 6:66-69)
그리고 마침내, 그가 성경 속에서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온다. 마지막 밤,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릴 때다. 예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자신을 드러내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때 유다는 질문한다. 왜 세상에는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만 보이려 하십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우리가 선택받은 사람이라서 우월하다는 뜻인가요.” “세상은 어떻게 하나요.”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까지 가나요.” 이런 떨림이 질문 안에 들어 있다. 그는 숨기지 않고 묻는 선택을 했다. 너는 중요한 질문이 생길 때, 체면 때문에 삼키니 아니면 조심스럽게라도 꺼내니? (참고: 요 14:22)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한복음 14:22, 개역개정)
그 질문을 받은 예수의 대답은, 유다의 마음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끈다. 예수는 ‘세상에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보다 ‘사랑과 순종이 만드는 자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유다는 그 답을 들으며 자기가 꿈꿔온 방식과 예수의 방식이 다르다는 걸 다시 확인했을 것이다. 내 방식 내려놓기는 언제나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이 관계를 더 진실하게 만든다. 너는 누군가의 대답이 내 기대와 다를 때, 더 묻고 싶니 아니면 마음을 닫고 싶니? (참고: 요 14:23-24)
그 밤 이후, 모든 것이 급격히 무너진다. 체포, 도망, 십자가, 침묵. 그 시간에 유다는 제자들과 함께 두려움 속을 지나야 했다. 성경은 누가 어디까지 도망갔는지 세세히 적지 않지만, 제자들이 흔들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유다도 떨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공동체로 돌아오는 쪽을 선택한다. 흩어져 혼자 살 수 있었지만,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모이는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너는 실패한 후에 사람들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니? (참고: 요 20:19)
부활 소식이 들려오는 순간도, 선택의 순간이다. 믿고 싶지만 믿기 어려운 이야기. 환호하고 싶지만 조심스러운 마음. 유다는 제자들과 함께 그 소식을 품고, 다시 길을 바라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가룟 유다의 빈자리를 마주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남긴 상처를, 같은 공동체가 함께 회복해야 한다. 유다는 그 상처의 무게를 더 깊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며 회복의 시간을 견디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너는 누군가의 상처가 공동체에 남았을 때, 떠나니 아니면 함께 치유의 시간을 보내니? (참고: 행 1:13-26)
오순절 이후 교회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유다의 삶도 다시 움직였을 것이다. 성경은 그의 구체적인 여정을 길게 추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성경은 여기까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그가 다른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는 큰 흐름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 길은 안전하지 않다. 낯선 언어, 낯선 시선, 때로는 적대. 그는 집을 떠나는 두 번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처음 부름을 따라 떠났던 그날처럼, 다시 한번. 너는 익숙한 곳을 떠나 누군가를 위해 낯선 곳으로 갈 수 있니? (참고: 마 28:19-20, 행 1:8)
교회 전승은 유다를 “다대오”라고 부르며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떤 전승에서는 다른 사도와 동행했다고 하고,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그가 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소식을 조용히 전하며 공동체를 세웠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전승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로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전승들이 말해주는 공통의 분위기는 있다. 유다는 늘 전면에 서기보다, 사람들 곁에 머무는 방식으로 일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너는 큰 박수보다 조용한 지속을 선택할 수 있니? (참고: 행 2:42-47)
또 하나의 흥미로운 연결이 있다. 신약에는 “유다”라는 이름으로 된 짧은 편지가 있다. 어떤 교회 전통에서는 그 편지의 저자를 사도 유다와 동일인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관점에서는 예수의 형제 유다로 보기도 한다. 성경 자체는 그 부분을 확정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만 말할 수 있다. 만약 사도 유다와 연결 짓는 관점이라면, 그는 글로도 공동체를 지키려 했던 사람으로 비춰진다. 말과 글로 지키는 선택은 때로 몸으로 뛰는 것만큼 어렵다. 너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조용히 경고하고 돌보는 말을 할 수 있니? (참고: 유 1:1)
그의 마지막은 성경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전승은 유다가 박해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고도, 다른 방식으로 생을 마쳤다고도 전한다. 어느 쪽이든 공통된 질문이 남는다. “이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유다는 이름의 오해를 안고 시작했고, 기록의 빈칸을 안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 빈칸이 오히려 우리에게 묻는다. 스포트라이트 없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신실할 수 있니. 너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아도 옳다고 믿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니? (참고: 마 24:13)
유다의 이야기는 화려한 반전보다, 조용한 지속에 가깝다. 그가 남긴 가장 선명한 장면은 질문 하나다. “왜 우리에게만, 세상에는 아니하십니까.” 그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진다. 믿음은 담장을 세우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길을 더 넓히는 초대가 될 수 있다. 한 관점으로는, 유다는 그 초대의 방향을 붙잡으려 했던 사람이다. 믿음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을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는 작지 않은 인물이다. 너는 네 믿음이 누군가를 멀어지게 하니, 아니면 가까워지게 하니? (참고: 요 13:34-35)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를 “기록이 적은 사람”으로만 남겨두지 않으려 한다. 기록이 적다는 것은, 그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이런 길을 보여준다. 이름이 오해를 부르고, 내 역할이 작아 보이고, 내가 가진 질문이 어색해 보여도, 그 자리에 남는 것. 그리고 필요할 때는 용기 내어 묻는 것. 너는 오늘 어떤 질문을 조심스럽게라도 꺼내볼 수 있을까? (참고: 요 14:22)
- 참고 구절: 마 10:2-4
- 참고 구절: 막 3:18
- 참고 구절: 눅 6:14-16
- 참고 구절: 요 14:22-24
- 참고 구절: 요 20:19
- 참고 구절: 행 1:13-14
- 참고 구절: 행 1:23-26
- 참고 구절: 행 2:42-47
- 참고 구절: 유 1:1
- 참고 구절: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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