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은 홍수 이후 새 출발의 한복판에서, 가족의 약함을 어떻게 다룰지 선택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한 번 본 것”보다 “그 뒤에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덮었는가”가 관계를 얼마나 깊이 바꾸는지 보여준다.
만약 네가 함처럼, 누군가의 부끄러운 순간을 우연히 보게 됐다면? 그때 너는 무엇을 먼저 하겠니?
홍수 이전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고,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의 숨은 긴 시간 동안 같은 공기와 두려움을 나눴다.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셈과 함과 야벳, 그들의 아내는 모두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곧장 평안해지진 않았을 거야. 물이 빠지고 문이 열렸을 때, 그들이 처음 밟은 땅은 익숙한 고향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낯선 무대였다. 그 낯섦은 설렘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이기도 했겠지. (참고: 창 7:13, 창 8장)
함의 “출생”을 성경은 자세히 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함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로, 가족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 자리를 가져왔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단순히 혈통만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과 말의 습관까지 포함했을지 모른다. 어떤 관점으로는, 홍수는 세상을 씻어낸 사건이지만, 사람의 성격과 관계의 결은 방주에서 그대로 함께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다. 너는 큰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더 선명해진다고 느끼니? (참고: 창 5:32, 창 6:10)
홍수 뒤 노아는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다. 그 장면은 ‘살아남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먼저 하느냐를 보여주는 듯하다. 노아의 선택은 감사와 예배 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은, 놀랄 만큼 인간적이고, 너무 현실적이다. 새로운 시작의 가장 앞줄에 선 사람도 피곤할 수 있고,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성경은 숨기지 않는다. (참고: 창 8:20-21)
노아는 농사를 짓고 포도원을 가꾼다. 땅은 다시 일구어야 했고, 씨앗은 다시 심어야 했고, 먹을 것은 다시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첫 번째 갈등이 생긴다. “새로운 삶을 위해 무엇에 힘을 쏟을 것인가?” 노아는 땅을 선택한다. 그 선택은 생존과 회복을 위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취약한 지점을 드러낼 무대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 얻은 작은 위로를, 어느 순간 과하게 붙잡을 때가 있지 않니? (참고: 창 9:20)
그리고 어느 날, 노아가 술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온다. 성경은 그 순간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만 놓는다. 함이 그 장면을 “보았다”고 말할 때, 우리 마음에는 질문이 생긴다. 함은 어떤 마음으로 장막을 들여다봤을까? 우연이었을까,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혹은 가족 안의 오래된 감정이 고개를 들었던 걸까? 성경은 단정하지 않지만, 선택의 자리는 분명히 보여 준다. “본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 (참고: 창 9:21-22)
함의 선택은 ‘형제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두 번째 갈등이 생긴다. 약함을 본 사람은, 그 약함을 덮을지 퍼뜨릴지 선택한다. 함은 장막 밖으로 나와 형제들에게 말한다. 그 말이 어떤 톤이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하지만 형제들의 반응을 보면, 그 말이 단순한 보고 이상의 무게를 가졌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떠올려 볼 수 있다. 너는 누군가의 부끄러움을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본 적이 있니? (참고: 창 9:22)
셈과 야벳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들은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는다. 그들은 아버지를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린다. 이 장면은 단순히 ‘예의 바름’만 말하는 것 같지 않다. 세 번째 갈등은 이것이다. “수치를 덮는 일은 진실을 숨기는 일인가, 아니면 사랑을 지키는 일인가?” 셈과 야벳은 덮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아버지의 약함을 없애지는 못하지만, 관계의 파괴를 멈추게 한다. 너는 진실과 사랑 사이에서 무엇을 먼저 붙들어야 할 때가 있다고 느끼니? (참고: 창 9:23)
여기서 감정의 변화가 생긴다. 함은 ‘말한 사람’이 되고, 셈과 야벳은 ‘덮은 사람’이 된다. 같은 사건을 지나갔는데, 셋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을 거야. 함은 억울했을 수도 있다. “내가 거짓말했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반대로 셈과 야벳은 함을 보며 마음이 멀어졌을 수 있다. “왜 굳이 그렇게 말했지?”라는 질문이 남을 수 있지. 우리도 가족이나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건 하나가 관계의 결을 바꾸는 순간을 겪지 않니? (참고: 창 9:22-23)
노아가 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다”고 한다. 여기서 네 번째 갈등이 생긴다. “알았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노아는 즉시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은 함이 아니라 가나안에게 향한다. 이 대목은 많은 사람이 어려워하는 지점이다. 성경은 이유를 길게 풀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여러 관점을 놓고 바라봐야 한다. 한 관점으로는, 고대 가족 구조와 후대의 관계를 함께 묶어 보는 방식이 있었을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이 장면이 단순한 개인의 감정 폭발이 아니라, 앞으로 이어질 민족 간의 긴장과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서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단정은 피해야 한다. 너는 누군가의 상처 난 말이 ‘지금’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흔들어 놓는 걸 본 적이 있니? (참고: 창 9:24-27)
다섯 번째 갈등은 “책임의 무게가 어디에 놓이는가”이다. 함의 행동과 노아의 반응 사이에서, 독자는 쉽게 한쪽을 완전히 악으로 규정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함은 분명히 ‘말하는 선택’을 했고, 노아는 분명히 ‘저주하는 선택’을 했다. 이 두 선택 사이에는, 방주에서 함께 견딘 세월, 홍수 뒤의 피로, 가족의 권위, 그리고 관계의 감정선이 얽혀 있을 수 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그 사람을 무너뜨리는 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참고: 창 9:22-27)
여섯 번째 갈등은 “가족 안의 권위와 존중”이다. 성경은 아버지의 약함을 덮는 형제들의 태도를 보여 준다. 그 태도는 아버지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지키려는 결단에서 나온다. 하지만 동시에, 권위가 사람을 상처 주는 방식으로 휘둘릴 때가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노아의 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생각하면, 함은 그 순간 어떤 얼굴이었을까? 말을 꺼내기 전의 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함은 다른 길을 선택했을까? (참고: 창 9:20-27)
시간이 흘러, 성경은 함의 후손들을 말한다. 함의 아들로는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 언급된다. 이는 단지 이름 목록 같지만, 이야기의 무게는 여기서 커진다. 일곱 번째 갈등은 “한 집안의 이야기와 큰 역사가 엮이는 지점”이다. 함의 이름은 개인으로서의 함만이 아니라, 이후 이스라엘이 마주하게 될 여러 땅과 민족을 떠올리게 하는 표지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후손의 역사 전체를 한 사람의 단일 행동으로 환원하는 건 위험하다. 성경은 그런 단순한 수학처럼 굴지 않는다. 너는 과거의 사건 하나를 이유로,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한 덩어리로 판단해 버린 적이 있니? (참고: 창 10:6-20)
구스의 계보에서 니므롯 같은 인물이 언급되며 “땅의 첫 용사”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장면은 인간이 새 출발을 하면서도 다시 힘과 명예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여덟 번째 갈등은 “회복 이후 무엇을 향해 달릴 것인가”다. 홍수는 끝났지만, 욕망과 경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함의 후손 이야기가 이런 장면과 이어질 때, 우리는 함이 그날 장막 앞에서 했던 선택과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다시 만나게 된다. 너는 힘이 커질수록 겸손해지기 어렵다고 느끼니? (참고: 창 10:8-12)
아홉 번째 갈등은 “말의 방향”이다. 함은 장막에서 본 장면을 ‘밖으로’ 가져간다. 셈과 야벳은 ‘안으로’ 들어가 덮는다. 때로는 문제를 밖으로 꺼내야 할 때도 있다. 억압과 폭력은 덮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덮는 선택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한 관점으로는, 이는 보호받아야 할 약함과, 드러나야 할 악을 구분하는 지혜를 요구한다. 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경계를 고민하게 된다. 너는 “말해야 할 것”과 “덮어야 할 것”을 어떻게 구분하니? (참고: 창 9:22-23)
열 번째 갈등은 “수치가 관계를 먹어 치우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셈과 야벳이 뒷걸음질로 들어가는 장면은 아주 구체적이다. 그들은 ‘호기심’을 절제한다. 그들은 ‘상대의 약함’을 소비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닿는다. 누군가의 실수, 누군가의 흔들림이 소문이 되어 퍼질 때, 우리는 클릭하고 말하고 웃을 유혹을 받는다. 함의 선택은 그런 유혹과 닮아 있을까? 너는 약함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을 살리는 말부터 할 수 있을까? (참고: 창 9:22-23)
함의 “마지막 기록”은 그가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 노년에 어떤 회개를 했는지 같은 방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성경은 함을 오래 붙잡아 두지 않고, 그의 이름이 후손의 이야기 속에서 길게 이어지게 한다. 그래서 함의 퇴장은 조용하지만, 여운은 길다. 어떤 관점으로는, 함은 한순간의 선택으로만 기억되는 인물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지나쳐 버리는 “관계의 순간”을 크게 확대해 보여 주는 거울 같은 존재다. 너는 너 자신의 인생에서도, 누군가에게 ‘그 순간으로만’ 기억된 적이 있니? (참고: 창 10:1, 창 10:6)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함이 그날, 장막에서 나와 형제들에게 말하기 전에 잠깐 멈췄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는 아버지의 약함을 조롱이 아니라 보호의 마음으로 바라봤다면, 가족의 대화는 달라졌을까? 반대로, 만약 노아가 깨어난 뒤, 단숨에 저주의 말을 쏟아내기보다 상처를 말로 풀어냈다면, 후손에게까지 남을 긴장과 아픔은 달라졌을까? 성경은 그 답을 우리 입에 넣어 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선택의 무게를 맡긴다. 오늘 너는 누군가의 약함을 마주했을 때, 어떤 말을 선택하겠니? (참고: 창 9:24-27)
함의 이야기는 “누가 완벽하냐”가 아니라, 약함을 마주한 뒤 우리의 시선과 말이 어디로 향하느냐를 묻는다. 홍수 뒤 새 세계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 관계를 살리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도 함께 보여 준다. 너는 지금, 누군가를 살리는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겠니? (참고: 창 9:18-27)
- 참고: 창 5:32
- 참고: 창 6:10
- 참고: 창 7:13
- 참고: 창 8:20-21
- 참고: 창 9:18-27
- 참고: 창 10:1
- 참고: 창 10:6-20
- 참고: 창 10:8-12
- 참고: 대상 1:4
- 참고: 대상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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